서암스님─부처되는 일등 수행의길

부처되는 일등 수행의길

-서암스님-

사람들은 무엇이든 대체로 삼단계로 나누는 습관이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도 보면 1등 2등 3등을 선정해서 상을 주고 나머지는 다 등외가 되지요.

그렇듯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일등 생활하는 사람, 이등 생활하는 사람, 삼등 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일생을 산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으로 사는 이치를 알고 잘 사느냐 못 사느냐 경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거든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다 잘 살려고 하는 것이지, 이 사는 일 빼놓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잘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부처님 말씀도 무슨 별다른 법은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이 세상에 나왔는데, 무엇 때문에 왔으며 할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문제 하나 뿐입니다.

그 길을 모르면 결국 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항상 죽는 구덩에 빠져 헤매이게 됩니다.

그 헤매이는 구덩이를 벗어나 잘 사는 길을 가는 부처님 법도 일등 법이 있고 이등 법이 있고 삼등 법이 있습니다.

상등 인물은 간단하게 한 마디에 깨달아서 나고 죽는 그 그물을 뛰쳐 나옵니다.

이런 사람이 일등이지요 그렇지 못하면 경(經)도 배우고 율(律)도 배우고 온갖 기도와 주력을 하는 등 자신을 갈고 닦으면 이등으로도 생사해탈, 그 경지에 참석이 됩니다.

물론 도달하고 보면 그 자리는 일등이나 마찬가지지요 또 그런 자리를 분명히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 즉 복을 닦는 것으로도 그 자리에 도달합니다.

절도 짓고, 시주도 하고, 절에 와서 나무도 하고 땅도 파고 일체 일을 하면 삼등으로 참석되거든요.

결국 모든 길이 그 궁극에는 일등이나 목표가 같습니다.

만약 일등법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참선은 조용한 곳에만 있지는 않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조용한 곳에만 참선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용행사 행주좌와 온갖 행동하는 그 속에도 있지 않고 , 이리저리 따지는 사량분별에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참선은 어느 곳에 있겠는지요.

이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꽃을 하나 가꾸고 곡식 한 톨을 키우는 데도 부단히 살펴야 합니다.

벌레가 침범하지 않는가.

가물지 않는가.

너무 습하지 않는가…..

이렇게 여러가지로 살피고 돌보지 않으면 훌륭한 꽃은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곡식도 마찬가지로 살피지 않고는 제대로 되지 않지요.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시시각각 자기 인생을 반성하고 살피지 않으면 저 생사해탈의 등급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사는데 바빠서 시시각각으로는 반성 못한다 해도 적어도 취침에 이르러서는 내가 하루 종일 어떠한 생활을 했느냐 가만히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만 살펴보기 위해서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 차리고 살기 위해서는 살펴보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펴서 허물이 있으면 참회해야 되고요.

허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살펴서 반성하며 다시는 않겠다고 하는 데에서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 열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참회문을 중요하게 여기셨지요.

이것이 혹 내힘을 잘 안될 때에는 부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로써 참회하는 길도 있습니다.

중생의 세상살이에 불법을 모르면 전부 허물 투성이지요.

한마디 말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자기 편견으로 남을 오해하는 등.

가만히 살펴보면 한없이 많이 허물을 짓고 있거든요.

그런것을 항상 자기 마음의 밝은 빛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생사의 그물로 떠내려 가버립니다.

우리가 염불하고 부지런히 법문 듣는 이유도 참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 내 인생을 바로 찾자는 노력이거든요.

이것 없이는 도저히 안되지요 따라서 주력을 하든, 염불을 하든, 독경을 하든지 항상 열심히 참회 정진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등 수행법이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그런 이치도 전혀 모르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남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가는 식으로 남이 좋다니까 따라서 절에 가는 식이지요.

아는 것도 없고 용기도 없지만 그래도 뭔가 부처님 법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하여 부지런히 쫓아다니는사람들이지요.

그렇게 해도 열심히만 하면 궁극에는 저 길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디지요.

사실 저 일등법으로 도달하는 생사해탈의 불법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통해 항상 자기를 반성해서 부처님의 법에 어긋남이 없는가 하는 것을 비추어 보는 것에서 찾아집니다.

그렇게 비추어 보면 부지런히 염불하고 정진하면 자연히 마음이 한가해져 흔들림없이 살아집니다.

그러니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한 정신이 항상 빛나지요.

이것을 일러’목대천차(目對千差)나 심한일경(心閒一境)이라’합니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천가지 차별이 있어, 보기 좋은 것도 있고 보기 싫은 것도 있고 듣기 좋은 것, 듣기 싫은 것, 사랑하는 사람, 미운 사람등 몇 천 형형색색의 말할 수 없이 수많은 경계가 우리 앞에 닥치고 있거든요.

그러니’목대천차’지요.

그러나 이렇게 천가지 만가지 차별을 대하더라도 ‘심한일경”마음은 항상 한가한 경계에 있다’는 이것이 무슨 뜻이냐.

자기를 살피고 관조하고 뉘우치고 참회하는 그 빛나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살필수 있는 한가한 경계가 하나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참선 화두하는 사람은 화두로써 그 자리를 점령하고,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하는 염불로써 점령하고, 주력하는 사람은 주력으로써 점령하고, 독경하는 사람은 독경으로써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요.

법당을 향해 합장하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천가지 차별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요요하게 그 한 자리가 빛나는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참 눈코 뜰새 없이 바쁩니다.

그런데도 만사를 집어 던지고 절에 갈 때는 한 발자국씩 옮기는그것이 부처님 세계에 한 발자국씩 다가서는 것이지, 누가 공연히 걸어가는 것이 아니지요.

거기에는 다만 기도하는 정신 그 하나뿐이지요.

항상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절을 향해 집을 나서면 그때부터는 바로 법당에서 정진하는 그런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절에 간다고 하면서 온갖 생각에 뒤흔들리고 가다 오다 누가 싸움하면 참견하고, 놀고 춤추는 데 참여하고, 온갖 경계에 마음이 다끌리면 법당을 향해 오는 순수한 정신은 없다고 봐야 하거든요.

이렇게 항상 부처님 품 안에 있는 그 생각을 갖는 것이 일등 수행법의 태도요, 참선법이지 참선법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걸망 들고 거리를 헤매든지 법당에 앉아있든지 간에 두 경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웃을 수 있고, 내가 물 할 수 있어야지.

남이 울린다고 울고 남이 웃긴다고 웃고, 바람에 날리는 기폭 마냥 경계에 흔들리는 것은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남이 나를 살아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있든지 항상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정진하면 그것이 다 공부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되고 보면 세계는 완전히 달라지지요.

한 마디로 꿈을 깨는 세계예요.

그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세계를 획득하게 합니다.

화두를 하든 염불을 하든 항상 진실하게 하고, 배운 것을 진실하게 실행한다면 다 그러한 길, 생사를 초월하는 경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 법을 모르면 천당 가고 지옥 가고, 소 되고 말 되고, 아들 되고 되고, 귀신 되고 도깨비 되어 만나는 그야말로 등외(等外)의 인간이 헤매는 세계가 펼쳐지니 이것이 참말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원통한 줄 알았으면 이 몸 받았을 때 어떻게 하든지 이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 해결하지 않으면 다 헛사는 것이요.

낙제생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부처님께서 간곡히 설하신 팔만사천 법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법이란 그야말로 우리 중생에게 주신 부처님의 영원한 선무이지요.

이 선물을 잘 받아 간직하고 이어나가는 것이 부처님의 제자요.

또 그 길밖에 우리가 사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참으로 원수도 적도 없이 개미 한 마리 풀 한 포기도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감싸주시는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아니고는 이러한 세계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이 세상에 적이 없고 절대 평등하며, 누구나 마음하나 깨치면 그 자리에서 꿈을 깨고 성불한다고 하십니다.

소 잡는 백정이 칼을 집어 던지니 그 자리에서 ‘즉신성불이라’했거든요.

그야말로 인과나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인생살이란 다 한바탕 꿈입니다.

우리는 이 꿈을 깨야 합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저 숱한 가르침이 모두 꿈 깨라는 것입니다.

꿈을 깨고 보면 어느 신이나 창조주가 나를 못살게 하고 잘살게 하고, 죄짓게 하고, 영리하게 하고, 바보스럽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자업자득으로 자신이 그런 꿈을 만들어 자신이 받는 것이지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인과법입니다.

꿈 깨는 방법-이것이 참선이고, 염불이고 주력이며 공부입니다.

물론 그런 것 저런 것 다 모르고 남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가는 식으로 절에 가고 , 불공을 쌓아놓고 ‘복많이 주십사’고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백원 갖다 놓고 천원 만원 기다리는 것으로 뭘 자꾸 욕심으로 요구하는 식이지요.

이런 식으로도 열심히 하다보면 일등 이등은 아니지만 삼등으로 그 길에 도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늦지요.

이 인생이 그냥 한없이 사는 것이 아닌데 어찌 그리 더딘 길을 가겠습니까? 이렇게 불법인연 만난 공덕으로 기필코 다시는 삼계 고해에 휩쓸리지 않고 부처되는 일등 수행에 힘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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