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은 마음을 다스려 장애를 넘는 것 |
지안스님
(은해사 승가대학원장) 불자님들이 신행하면서 법회에 같이 모이는 것은 아름다운 선근 공덕을 성취하는 인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바세계에서 갖가지 인연 맺고 살면서 그중 부처님 법을 수지하고 가르침을 따라서 생활할 수 있는 이 인연은 삶의 참다운 가치와 의미가 나타난다고 말 할 수 있겠지요.
불교는 모든 것을 인연관계라고 합니다.
이 말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관계 맺어 나타나는 일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면 ‘이것이 인연이구나’.
인연은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으로 구분하는데 좋은 인연이 맺어지면 나에게 복이 오고 나쁜 인연이 맺어지면 화가 일어난다 합니다.
조선시대 때 천경(天鏡)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이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을 밭에 비유하는데 콩을 심으면 콩밭이 되고 고구마를 심으면 고구마 밭이 되듯
중생이 부처님을 통해서 복을 짓는다 해서 복전(福田) 복밭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신행하는 것은 부처님 밭에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비록 조그만 씨를 몇 개를 심더라도 부처님 밭에 심어 놓은 씨앗은 다른 어떤 밭에 심은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같은 농사를 짓더라도 옥토냐 박토냐에 따라 수확이 다르니 이왕지사 땅에 씨를 부릴 때 조건이 인연이니까 좋은 밭에 씨를 뿌리면 수확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부처님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기름진 옥토에 뿌리는 씨와 같아서 대량 수확이 됩니다.
불전에는 조그만 종자를 심어놓으면 헛된 일이 없다.
간혹 씨를 뿌려놓고도 몹시 가물다던지 태풍이 오면 전답을 다 쓸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부처님한테 뿌린 씨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예전에 의학이 발달되기 전에는 속병을 없애기 위해 금이나 금강이라 하는 다이아몬드를 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금강이나 금이 몸 속에서 내장을 다 지나 항문으로 나오면서 몸 안에 나쁜 병 기운을 다 씻고 나온다고 믿었답니다.
그런데 그것은 조그만 덩어리만 먹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몸 밖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천경 스님이 비유한 말씀이 ‘금강을 먹을 때에 금강이 흉복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다’.
입으로 먹었을 때 몸 안에서 속병의 기운을 씻어버리고 아무 손상됨이 없이 몸 밖으로 나옴과 같다.
즉, 부처님 밭에 뿌린 씨앗은 결코 썩거나 발화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이 세상을 인과법으로 보라.
우리 현실의 경계에 사회현상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처럼 모두 인과법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신행을 통해 불교를 믿는다고 합니다.
흔히 ‘저 사람은 무슨 종교를 믿느냐?’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에 다니는 사람은 불교, 교회 다니면 기독교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은 법 안에 들어와야 믿음이 됩니다.
저는 통도사에 오래 살았는데, 절에 관람객들이 오면 경내 한 바퀴 돌면서 구경하고 갑니다.
그 사람들은 불교신자가 아니라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신도들은 법당에 들어와 예배하고 발원하고 갑니다.
그래서 절 하러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냐는 차이로 관람객과 신도로 구분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법당에 들어오고 절에 다니려해도 부처님 법이 내 가슴에 있어야 불교가 확실히 믿어집니다.
이것을 교리를 설명할 때는 인과법을 믿어야 불법이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를 흐리게 하는 다섯 가지 나쁜 업이 있는데 인과를 무시하는 것은 불교를 파괴하는 것으로 왕조시대의 역적죄처럼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인과법을 무시하면 이것은 불교가 바로 안 믿어집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과법이 세상을 바로 보게 만드는 기본적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인연법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현실이 인연이다.
인연을 가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꽃밭의 꽃을 심고 가꾸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것은 인연을 가꾸는 것입니다.
인연을 잘 가꾸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일심법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 하나가 좌지우지한다.
마음이 부처이다.
선가에서도 수없이 이 법문이 설해졌고 외경에서도 화엄경 같은데서 마음 부처 중생의 세가지가 똑같고 차별이 없다.
불교를 오래 깊이 공부해서 교리적인 것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해도 부처님 법은 인과법, 연연법, 일심법이다.
이 세 가지만 알면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 마음을 밝고 고요하게 해줍니다.
법당이나 집이나 여행중에도 머릿속에 부처님 이미지가 떠오르면 마음이 밝고 고요해집니다.
업이 충돌하다 보면 나라가 어지럽고 지구촌이 몹시 앓고 있어서 실망 절망 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자살공화국이라고 났는데 하루에 36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자살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많다는 것인데 그래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기사를 읽고 나서 제가 스님이니까 자살한 사람들의 불우한 처지에 동정심이 일어나지만 불교를 만나 불교를 믿었으면 극한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뗀데 하는 안타까움도 일어납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삶의 의미를 강하게 느낍니다.
부처님 법문이 이 정신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인생은 참 묘합니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은 마음의 의지가 있을 때는 아무리 불우한 환경에서도 강해집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가 인간의 의지가 나약하고 스스로 감정에 북받쳐서 성격장애가 옵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사회가 다변화되고 복잡다단화 하다보니 환경으로부터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번민의 고통이 옵니다.
시내에 나가면 차가 막히고 마음이 짜증나고 이런 것도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를 사용하고 살지만 그런 문명의 이기에도 불구하고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더 많아집니다.
모순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사실은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잘 먹으면 쉽게 극복됩니다.
마음 잘 먹는다는 이야기는 선조들이 많이 쓰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견디어내며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수용하는 폭을 넓히면 견디어지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걸리나하면 그 사람의 성격에서 장애가 옵니다.
그래서 성격에서 오는 장애를 이기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인생포기하고 자살하고 남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성격으로부터 오는 장애가 문제입니다.
부처님 법은 뭡니까? 마음 다스리는 법, 성격을 좋게 만들어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불교 수행이 특별한 신통 부리는 초능력을 얻어내는 것 아니고 자기 마음을 잘 써서 성격을 좋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성격이 잘못된 사람은 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데 가정폭력이 많고 가족 간 화목하지 못하고 부부간에도 반목질시 합니다.
우리나라 도덕 수준이 타락했는데 자식에게 맞아죽는 부모가 사십명이 넘어섰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충격을 주는 이야기입니까.
이 전부 성격장애입니다.
그래서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산업사회 자본이 생활을 지배할수록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성격장애를 일으킵니다.
불교의 신행이라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관음재일입니다.
원래 ‘재’는 음식을 해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뜻도 있고, 목욕재개라는 말이 있듯이 신구의의 나쁜 삼업을 짓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삼업에서 나타나는 십악이 있는데 천수경에 십악 참회하는 구절이 있잖아요.
오늘만은 신업 구업 의업을 삼가자.
그래서 신구의 삼업을 경계해서 근신 조심하는 날이 재일이에요.
또한 관세음보살은 모성을 띠고 있는데 그래서 항상 우리 마음에 자비의 물이 흥건히 고여서 물이 만물을 적셔주듯이 자비로 일체 중생을 이해해주자.
이런 기원을 관세음보살에게 서원하고 기도하면서 함양해 가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거칠어지고 중생의 업이 더 치성해질수록 중생들이 전화의 공간을 더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불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위로 받고 싶고 따뜻한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자신이 자신을 달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힘들고 내 속에 업장이 두껍고 누구와 관계가 원만치 못하고 생활주변에서 나타나는 경계가 있을 때 스스로를 달래야합니다.
내가 나를 달래는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고승이 계셨는데 이분의 게송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세상은 전부 아름다운 세상이다.
봄에는 온갖 꽃 피고 가을에는 달이 밝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에는 흰눈이 내린다.
이것은 사계 속에서 사람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는 요소들이 항상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 내 자신 신상의 해결할 수 없는 최악의 절망 상태를 느끼더라도 세상은 열리게 되어 있고 돌파구는 있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열고 닫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열리기 위해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여기저기 유흥가가 생기고 모텔이 들어서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환락 문화가 기승부립니다.
계모임이라 해서 전부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차 마시고 주고 받는 이야기가 지 자랑 아니면 남 흉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계모임 해서 식당 가서 막 먹다가 살찐다고 수영하고 에어로빅 하는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 세상의 환경이 좋아질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정신혁명입니다.
부처 깨달음은 사회학적으로 보면 정신혁명입니다.
불교의 믿음을 스라다라고 하는데 몰랐던 사실을 알았을 때, 오해가 있었을 때는 자꾸 의심이 있었지요.
저 사람 나쁜 사람 아닌가하고 느껴지면 하면 항상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딱한 사정이 있는데 그렇게 착한 일을 했나 하고 알고 보면 감동합니다.
어느날 노스님에게 어떤 처사가 와서 ‘스님 부처님 가르침이 뭡니까? 쉽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나귀를 타고 가는 두 사람이 가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네.
며느리는 나귀 등에 태우고 시어머니는 꼬삐를 잡고 가는 것이네.’ 이것이 불교라는 말입니다.
보통 어른인 시어머니를 태우고 며느리가 고삐를 쥐고 가야지 인륜 도덕적으로 맞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말에는 묘한 것이 있습니다.
당연히 시어머니 타고 며느리가 잡고 가야하는데, 이건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 며느리가 임신했는데 몸이 갑자기 안좋아 몸에 땀이 뻘뻘나며 신열이 나서 시어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건너 마을 의원집에 가자고 해서 나귀 등에 태우고 가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감동이 일어납니다.
시어머니가 타는 경우는 일반적이니 감동이 안나지요.
이 말은 불교는 사람의 마음을 지극히 써서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깊은 법문입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미혹함에서 잘난 체 하고 까불고 알지 못하면서 진리에 대해서 오만합니다.
부처님 법에 대해 신심이 없으면 오만하고 교만해집니다.
또 한 얘기가 있는데 어느 마을에 세상 물정 모르는 두 바보가 살았답니다.
하루는 두 바보가 논에 가서 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어두워져 돌아오는데 달이 떠올랐습니다.
두 바보 중에 한 바보가 ‘벌써 해가 떴구나.’ 하니 다른 바보가 ‘이 바보가 달이 뜨는 것을 보고 해가 떴다고 하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보는 ‘바보 소리 마라.
밤에 뜨는 게 해다’.
하며 서로 옳다 그르다 실랑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건너 마을에 사는 바보가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바보는 저기 오는 사람에게 물어보자고 해서 ‘여보쇼.
저기 떠 있는 것이 해요 달이요?’ 하니 그 바보 말하길 ‘나는 이 동네 안 살아서 모르겠소.’ 라고 했답니다.
이 바보는 얼마나 정직한 바보입니까.
이렇게 바보가 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모르면서 잘난 체하고 거만해지고 오만해지고 신심은 없는 그 인생은 나중에 허망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법을 믿어가면서 자기 인생의 공덕을 성취해야합니다.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