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탄으로 佛國 이루리***
光德스님 법문 올해의 명념이라고 있습니다.
올해의 명념은 캠페인이라는 용어를 기왕에 썼던 모양인데 그 말은 제 뜻하고는 안 맞아요.
명념, 마음 속에서 새기고 새긴다.
샛길 명(銘)자 생각 염(念) 자예요.
새겨서 생각한다.
이것을 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찬탄합니다.
나의 생명 나의 가족 우리 사회의 한량없는 부처님 공덕이 충만한 것을 찬탄합니다.
우리는 말고 뜻과 온갖 정성 기울여서 부처님과 가족과 온 이웃과 자랑스러 운 환경을 찬탄합니다.
우리는 찬탄의 공덕으로 아름다운 소망과 빛나는 환경을 이룩하여 나갑니다.
” 이것은 (보현행원품)을 공부하실 때 우리가 배웠고 ‘보현행자의 서원’ 제3장에 이것이 나오니까 배웠을 것입니다.
이 찬탄을 명념하는 것으로써 우리기도 성취의 바탕을 삼았으면 합니다.
이 찬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칭찬하는 것입니다.
경에 보면 부처님의 공덕을 칭찬하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보현행원품을 공부할 때는 “부처님의 공덕은 어디 있느냐.
나 자신에게도 깃들어 있고 모든 사람에게 깃들어 있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공덕을 다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서 부처님의 공덕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찬탄하라.
“고 보현행원품에서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찬탄할 때 지혜의 눈이 열린 사람이고, 찬탄하지 못할 때 지혜의 눈이 어두운 사람이다.
일체 세계 일체 모든 사람이 찬탄 받아야 할 부처님의 공덕이시거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찬탄은커녕 비방한다고 하면 그것은 반야의 눈이 없는 것이다.
” 그런 공부를 우리는 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찬탄을 특별히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발달된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고귀한 우리의 성품을 발견하고 긍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대로 육체의 덩어리로, 물질의 변화로, 환경의 종속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깃덩어리이고 물질의 변형이고 환경의 종속물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무슨 인간의 가치가 있고 존엄이 있습니까.
인간의 신성이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누가 인간이 물질이 환경이 아니면 조건들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합니까? 나는 이 생각을 하면 톨스토이의 (참회록)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가 죽으려 할 때 죽으려는 순간 그 때 마음을 돌이 킨 것을 생각합니다.
“누구든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죽어야 한다는 판단을 누가 내리느냐.
” 바로 톨스토이는 자기에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한다는 판단, 나의 지성이 나의 감성이 파악한 바 나의 지성이 결국 이렇게 죽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느냐.
나의 감성이 판단하는가.
나의 지성이 판단하는가.
나의 지성, 감정은 뭐하는 놈이냐 나의 생명의 앞선 자냐.
종속자가 아니냐.
종속자 종놈이 나를 죽으라고 어떻게 판단하느냐.
여기서 권능을 포기 할 것인가.
‘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우리 생활 주변이, 문명이, 기술 문명의 발달이 참으로 우리의 신성과 존엄을 키워 주기보다는 인간 자체를 물질과 그런 환경 조건의 종속 물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은 바로 물질의 연장이다.
아니 육체의 덩어리다.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판단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악독한 퇴폐적 사상이 물결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의 심성은 오염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도 우리의 지식도 우리의 판단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요.
고귀한 생명의 시간을 마치고 고귀한 재물을 바치고 배웠어도 모두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배운 지식들이 인간의 소중한 참된 생명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라면, 역사가 흘러가고 많은 지식이 발달되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과학 문명이 발달됐으면, 인간의 덕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옛날 사람들보다 아름다워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의 생명,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덕성이 옛날 사람들보다 더 아름다워졌느냐 할 때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옛날 사람이 세련됐다고 하고 요즘 사람들은 못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왜 못 그렇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지성이 참으로 인간 생명 자신을 위해 봉사해야 할 지성이 생명을 분산하고 생명을 쪼개내고 생명을 자기 자신과 동격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마침내는 그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거의 인간사회를 완전히 기계화하고 기계화의 판단에 의해서 인간을 종속화하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러한 것에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기계문명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문명 비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는 차원은 좀 다르지만 미국의 젊은이들 중에서 문명파괴 사상까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을 좀 딴 데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반야의 눈으로 비춰 볼 때 우리의 생명 하나하나 이 하나하나는 무엇인가? 우리의 육체 덩어리 하나하나가 무엇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하나가 무엇인가? 반야의 눈이 열리기 전에는, 반야의 문이 열리기 전에는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나를 제약하고 관장하고 제한하는 것 입니다.
산은 나의 앞을 막는 것이고 바다는 그리운 사람과 사이를 끊어 놓습니다.
시간은 노쇠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모든 우리 주변이 그런 것이지마는 이것은 반야의 눈을 뜨고 보면 그런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 제한적인 것, 이러한 사항들은 우리의 감정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허망한 지견이 보아 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이 가지는 반야의 눈에서 볼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사실 고귀한 부처님의 공덕이 그 안에 충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 가운데 악하고 못나고 이런 것만 가지고 있는 것 같아도 내 생명 속에는 따뜻한 자비심이 깃들어 있고, 내 마음속에는 모두를 사랑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고, 내 생명 속에서는 건강한 것을 바라고 있고, 내 생명 속에서는 아름다운 평화를 추구합니다.
내 생명 속에서는 구석구석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내 몸에 건강과 조화를 요구합니다.
이 모두가 무엇입니까? 내 육체는 항상 말하다시피 이런 진리의 광명이 항상 깃들어 있어서 내 생명을 자동적으로 조정하고 있어요.
심층에 무의식 세계가 또한 그와 같이 해서 나의 생명을 조절시켜 주고 그 무의식 세계의 조율 세계가 모든 심정에 이르러서 또한 그와 같이 자기 조율을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나의 건강과 안정과 지속적인 생명의 지속 연장을 추구해 갑니다.
내 몸뚱이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 세계가 실은 반야의 눈을 뜨고 보면 진진찰찰 화엄세상이다.
그야말로 티글티끌 하나 하나마다 무한한 장엄이 가득한 청정국토다.
반야의 눈이 없는 세계에서 보면 우리를 한계 짓고 속박하고 죄를 떨어뜨리고 금방금방 죽어 가는 죽음을 지향하는 인간이지마는 반야의 눈으로 볼 때는 이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고귀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님의 은혜라고 이를 수 있는 진리의 위력이 꽉 차 있는 것 입니다.
내가 그렇고 나의 사회가 그렇고 국토가 그렇습니다.
반야의 눈이 있는 사람이 비로소 이것을 보고 반야의 눈, 그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볼 때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무엇이 다른가,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이 경사스럽고, 내가 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경사스럽고, 내가 여기 앉아 있는데 서로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이 경사스럽고, 온 천지가 모두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반야의 눈이 그렇게 봅니다.
반야 아닌 눈은 불행스럽고 고통스럽고 나를 시기하는 사람뿐 이고 나를 못 살게 뒹구는 것으로 보기 쉽고, 불평 불만, 마침내 죽음을 지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고통이 충만된 악의 세계라고 보아질지 몰라도 이 반야의 눈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 내가 살고 있는 이 하나하나, 뼈가 이렇게 되어 있고, 거기 살이 붙어 있고, 거기 심줄이 붙어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할 수 있고 이것 하나하나가 진리 자체의 완전한 표현입니다.
얼마 전에 책을 들고 앉으려니 허리가 뜨끔했습니다.
허리가 뜨끔하니까 허리가 꺾어지는 것처럼 앞으로 팍 거꾸러져 버렸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차디찬데 가서 며칠 회의한다고 대여섯 시간 앉아 있었더니 못 일어났어요.
지팡이 두 개를 짚고도 못 일어나서 어떻게 근근이 끌려 차에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허리가 꿋꿋하게 이렇게 앉아 있으니 이 자체가 얼마나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입니까.
사람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더라도 내가 앉아 있는 것, 내가 걸어가는 것, 내가 저기까지 움직인다는 것 등등 하나하나가 몰라서 그렇지 끝없는 무한한 은혜와 한없이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이 바로 나의 생명 나의 생활 나의 모두로 꽉 차 있건만 반야의 눈이 없인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전부 해치는 것이고 나를 죽이려 하고 못살게 구는 것이고 불행스러운 것으로만 보아진단 말입니다.
내가 나가서 내신 내가 찾아 신고 한 걸음 그대로 옮겨가는 그 사이에도 신을 못 찾을 수도 있고, 신고 일어서다가 주저앉을 수도 있고, 한 걸음 걷다가 얼음판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 남하고 부딪칠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날씨가 춥다 그러더니 걸어나오다 말고 서 있더니 그냥 확 쓰러져 버렸어요.
그리고 그대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장 지금 걸어가는 이 순간에도 끝없는 은혜와 위신력이 충만된 인생이건만 반야의 눈이 없는 사람들은 불행을 보는 것입니다.
고통을 보는 것입니다.
대립을 보는 것입니다.
미움을 보는 것입니다.
다행스럽다 경사스럽다보다도 불안하다, 고통스럽다, 밉다 등등 가시덤불 같은 것이 꽉 차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 생명은 죽지 않으려고, 오래 살려고 어떻게 하든지 안에서 자율적으로 무한공 덕이 조정되어 있건만 생각은 못그럽니다.
가끔 이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 전에 내가 자주 병원에 신세를 져서 입원해 있을 때 일입니다.
병원에서는 많은 환자들을 보게 됩니다.
저처럼 성질을 잘못 쓰고 마음 잘못 써서 병난 것은 예외로 하더라도 술 먹고 들이받고, 주먹으로 치고, 싸우고 해서 다쳐 옵니다.
그런데 자기는 잠시 다쳤지만 그 육체적인 생명 그 자체에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고치려고, 치료를 빨리 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자진해서 합니다.
저도 위를 자르고 창자를 잘라내고 몸에 여러 가지 부속을 빼냈는데 빼내면서 가만히 내 속을 들여다보면 안에서 자율적으로 돌아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 빤히 보여요.
창자를 두 번째 자를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잘라낸 후 내 속을 잘 관찰해 보니까 장 그것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내가 의식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해서 병이 나서 잘라내도 그 놈은 그 남은 것 가지고 살려고 노력을 하더라는 것 입니다.
원래로 우리가 그릇된 지경이 있어서 이 세상이 불행도 미움도 차 있는 것이지 내 몸 하나 병든 몸이라 하더라도 행복하고 다행스러움이 꽉 찹니다.
혹 바른 손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왼손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행복,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육백만 불을 준다고 하더라도 어림도 없습니다.
육백만불 준다고 이것은 안 떼어 줍니다.
실로 우리들은 반야의 눈에서 내 생명 구석구석에서 이렇게 끝없는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이 충만돼 있다는 것을 반야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나의 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가 있고, 아내가 있고, 또 남편이 있고, 혹은 다른 모든 주변 사람들이 있고, 친구가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생존경쟁에 있어서 나의 적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렇게 보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와 나는 협동해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미움으로 대하고 적으로 대할 때 그는 나와 더불어 적이 되고 미움이 됩니다.
세계적으로 기상정보를 같이 교환합니다.
기상정보를 교환함으로써 각자 자기 나라의 기상을 관측하고 예측도 합니다.
또 병균 같은 것, 페스트 같은 무서운 전염병 같은 것, 국제적인 협약을 통해서 이것이 만연되면 인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므로 서로 정보를 교환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국경이라고 제각기 지어놓고 따로따로 사는 것 같아도 우리 삶, 생존 자체는 따로따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만큼 그 모두가 참으로 기이한 덩어리입니다.
내 생명이 그렇고 나의 국토가 그렇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고 가정이 그렇고 형제가 그렇고 이웃이 그렇고 이 국토 이 땅 덩어리만 해도 메마른 땅, 자원이 없는 땅, 아주 가난한 땅이 아니라 사실은 무한한 공덕이 충만되어 있는 땅입니다.
나의 동포 형제들도 한없는 지혜와 덕성이 있는 동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문수 보현의 화현이며, 이 국토가 불국토를 성취할 땅입니다.
‘마하반야의 노래’는 내가 살고 있는 국토와 형제와 내 생명 하나하나가 무한의 진리덩어리 일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긍정하고 믿을 때 경사스럽다 다행스럽다 하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경사스럽다 다행스럽다 하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찬탄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 칭찬하고, 참으로 잘 됐다, 좋다, 참 잘했다, 이러한 찬탄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그 만큼 반야의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반야의 눈을 밝혀서 어떤 경우라도 모두가 사람이나 국토나 어디든지 꼭 진리가 충만해서 무엇이든지 꼭 되게 만듭시다.
그리고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의 말을 끊임없이 이읍시다.
남편에 대해서도 아무리 잘못한 점이 많더라도 잘못한 것은 내 눈이 삐뚤어졌다고 생각하고 칭찬 감사하고 우러러봅시다.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에서도 모든 상황이 참으로 찬탄할 수 있는 상황이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찬탄은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집안이 밝습니다.
찬탄의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집안 이 어둡습니다.
친구들끼리도 그렇고 어떤 사람이든 그렇고 직장도 그렇습니다.
서로 칭찬하고 찬탄하고 잘한다는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집안이 잘 되는 집안이고, 잘못한다고 잔소리가 많고 따지는 것이 많고 복잡한 심판 판결이 많은 집안일수록 그 집안은 사고 가정입니다.
사고 가정이 사고를 면하려거든 끊임없이 찬탄을 발견해야 합니다.
남편이 술먹고 집에 들어오더라도 늦은데 잘 찾아 오셨다고 반갑게 맞이하고, 코가 빠졌다 오시지 않아 좋다고 하십시오.
어쨌던지 화만 내고 문도 안 열어주고 어떤 식으로든지 처벌하려고 하는 것보다 백 번 나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찬탄이 그 집에 환희의 감정을 가져옵니다.
환희의 감정을 가져오고 찬탄과 반대인 불평, 불만과 싸움, 비판 저주 증오 이것이 불행을 가져옵니다.
거기에 이유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어요.
왜 그러냐, 진리, 마하반야바라밀 이 진리, 생명 바닥에 부르고 있는 진리, 우주에, 이 국토에, 이 환경 가운데 가지고 있는 이 진리는 찬탄밖에 다른 것이 없어요.
밝은 것 앞에 밝은 것밖에 없다는 말과 같이 찬탄해야 할 것밖에 다른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찬탄하는 것은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한 진리가 우리의 생활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를 따져서 이러니까 나쁘다고 비판하고, 증오에 찬 나쁜 말로 대립해서 따진다고 해서 내 생활환경이 좋아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따지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환경은 더욱더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분이 왔길래 그랬습니다.
그분은 결혼해서 석 달 동안 남편을 길들인다고 단단히 벼르고 잔소리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새로운 공허가 생깁니다.
빈틈이 생깁니다.
무슨 빈틈인가.
남자들은 나이가 들더라도 어린 아이처럼 아내에게 의지하고 싶은 심정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거친 환경 속에서 큰소리도 치고, 싸우기도 하고, 속으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헛위세를 부리지만 일단 집에 들어오면 이것저것 체면 다 놓아 버리고 탁 풀어집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마음놓고 쉬며, 자신의 속을 털어놓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들이려고 하는 엄처시하에서는 그 빈 구멍을 무엇으로 채우느냐 그거예요.
채우기 위해서는 딴 버릇이 나오는 것입니다.
집에 가는 것이 싫어지고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며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온갖 사고가 벌어져요.
우리 가정생활이나 개인관계나 직장관계나 사회나 어디나 비판하고 따져서는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비판해서는 평화도, 건설도, 힘의 융합도 오지 않습니다.
분열과 투쟁밖에는 안 옵니다.
그 거친 가슴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왜 부드럽고 따뜻하고 모두와 더불어 함께 가고자 하는 그 고귀한 생명을, 그 생명을 못 키워주느냐 말이에요.
찬탄하고 칭찬하고 당신의 생명에 깊이 깃들어 있는 진리와 광명을, 부처님의 완벽한 예술품과 같은 그 완전덕상을 당신이 가지고 있고, 그것을 보고 인정하고 칭찬해주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해요.
내 남편이 있으면 남편에게 그렇게 해요.
아내가 있으면 아내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친구에게 칭찬하고 그렇게 따뜻한 말로 위해 주십시오.
비판, 그분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아끼기 위해서 일러주는 말들은 비판이 아닙니다.
충고도 어떤 때는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 자세가 오만하거나 참으로 상대방을 아끼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 아무리 이로운 말이라도 듣기 싫은 것입니다.
참된 충고는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찬탄의 눈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찬탄이 무엇을 가져오느냐.
감사를 가져옵니다.
찬탄이 바로 진리의 긍정인 까닭에 내 생명과 내 환경 가운데 진리가 가득 옵니다.
올해의 기도는 반드시 찬탄이라는 토대 위에서 기도를 성취하자고 해서 올해는 찬탄의 해라 그랬습니다.
우리 다같이 한 번 읽어 봅시다.
“우리는 찬탄합니다.
나의 생명 나의 가족 우리 사회의 한량없는 부처님 공덕이 충만한 것을 찬탄합니다.
우리는 말과 뜻과 온갖 정성 기울여서 부처님과 가족과 온 이웃과 자랑스러운 환경을 찬탄합니다.
우리는 찬탄의 공덕으로 아름다운 소망과 빛나는 환경을 이끌어 나아갑니다.
” 여기에서 ‘자랑스러운 환경을 찬탄합니다.
‘ 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 한 마디 더 드리겠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인데 세상이 잘못되어서, 정치가 잘못되어서, 혹은 사회가 잘못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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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사회를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엔 그것에 대한 부정이 나옵니다.
사람을 보든지 자연을 보든지 꽃을 보든지 새를 보든지 흘러가는 물을 보든지 무엇이든지 내 마음을 찬탄하는 기쁨으로 채울 때 내 공덕이 결실됩니다.
어떠한 이유든지 비판과 부정, 증오, 대립, 갈등, 환경을 자기 가슴에 품고 있을 때 불행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이 한 해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망을 진리 위에서 꼭 성취시키고, 우리의 소망 한하나가 국토를 풍요롭게 만들고, 편안하게 만들고,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기도의 기초자세도 찬탄하고 결코 불경불만 없는 찬탄 칭찬을 제일로 삼아서 추구해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