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거스님─불자의 실천

***불자의 실천/

혜거스님

*** 정녕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인 각(覺)과 아는 것인 지(知)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명확합니다.

알고는 있으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알 지(知)’요, 아는 것이 실천으로 바로 이어지면 ‘깨달을 각(覺)’ 입니다.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라야 아는것이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아 향상하고, 멋진 삶 을 영위해야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는가? 불교를 깨달 음의 종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 는가? 이것을 연구해 들어가야 한 차원 높아지는 공부가 되고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연구해 들어가지 않으면 불교를 백년 믿어도 소용이 없습 니다.

경전에는 아는 것과 깨달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지만 행하지 못하면 마음이 없는 것과 같고 마음이 있고 행도 있으면 모든 부처님과 같도다.

유심불행동무심(有心不行同無心) 유심유행동제불(有心有行同諸佛) 마음은 있고 행이 없으면 마음을 먹지 않은 무지한이와 다를 바가 없으며, 마음이 있고 실천행도 뒤따르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연구하고 실천할 것인가? 나는 불자들에게 세 가지 사항을 많이 강조 합니다.

첫째, 1인 1경(經)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을 잘 실천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한 경전을 꾸준히 지니고 읽는 것을 의무 적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한 경전을 꾸준히 읽으면 자연히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고 행복해집니다.

그럼 어떤 경전부터 읽을 것인가? 만약 망설임이 있 다면 금강경부터 읽으십시오.

금강경은 반야(般若), 곧 올바른 소견과 지혜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일도 금강경 한 구절 아는 것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금강경은 중생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제일’ 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고통이 무엇이며 왜 생기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불만이 있으니 고통이요, 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으니 고통이요, 미운 사람의 그림자만 봐도 기분이 나빠지니 이 또한 고통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 할 것 없이 고통 없는 곳이 없는데, 그 근원을 살펴보면 집착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고통 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끊어야 합니다.

성문, 연각, 보살은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같이 듣지만 해석은 달리 합니다.

듣고 배우는 사람인 성문(聲聞)은, ‘집착이 모든 고통 의 원인이구나.

고통을 가지고 살지 말자.

집착을 끊 어버리고 벗어나자’ 하고는 현실의 모든 것에 대해 ‘버리고 떠나고 끊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버리고 끊게 되면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고통이 파생 됩니다.

인연을 잘 비추어보는 연각(緣覺)은, ‘고통은 집착으로 부터 나온다’는 말을 듣고, ‘집착도 영원하지가 않다.

오늘은 꽃에 집착하고 내일은 나무에 집착하고, 오늘 은 명예를 좇고 내일은 돈을 좇고 있으니…’라면서 성문보다는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무엇이 안 된다고 하여 몸부림치지 않게 되므로,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보살(菩薩)은, 근본자리를 깨달 아서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 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고통 자체가 없습니다.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성문, 연각, 보살은 이와 같이 차이가 납니다.

실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없애야 하는데, 집착을 없애는 방법이 바로 반야(般若) 입니다.

그럼 반야를 성취하는 방법을 제시한 경전은 무엇인가? 바로 금강경입니다.

반야의 근본자리에서 보면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설한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을 꾸 준히 수지독송 하다 보면 보살의 무집착(無執着)을 저절로 체득하게 됩니다.

물론 다른 경전을 읽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금강경부터 공부하고 매일 수지독송 하되, 궁금한 것이 있거나 더 향상하고자 할 때는 얼마든지 다른 경전을 공부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둘째,1일 1선(善)의 실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베풉시다.

이는 하루에 착한 일 한 가지씩을 꼭 하자는 것입 니다.

아무리 조그마한 선행일지라도 하루에 한 가지는 꼭 하는 버릇을 들이십시오.

눈에 띄고 마 음이 흐뭇할 정도의 선행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남을 칭찬해주는 말 한 마디, 기어 다니는 벌레를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좋은 선행입니다.

셋째, 날마다 자기 반조(返照)를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은 밖으로만 향 하여 사물에 끄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끄달림 속에서 갖가지 번뇌망상을 일으켜 미혹되고 고통 스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반조하면 어떻게 됩 니까? 자연 번뇌가 잦아들게 되고, ‘나’는 ‘참된 나’ 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이것이야말로 수행의 기본입니다.

우리가 매일 한 경전을 꼭 수지독송하고, 한 가지 선행을 쉬지 않고 실천하면서, 날마다 자신을 반조 하게 되면 크게 향상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머릿속에 딱 지니고 살면, 우리의 업은 억 겁의 업이라 할지라도 얼음 녹듯이 녹아 없 어지고, 어떠한 길을 걸어가든 조금도 장애가 싱기지 않는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월간 [법공양] 8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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