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유마경(維摩經) – 침묵과 대화

상대적 개념 초월 不二사상 설파, 사리·분별 떠난 깨달음의 노래
문학적 향취 뛰어난 대승경전, 유마거사의 중생 위한 無心법문 일품

가장 알찬 것은 빈 것 같이 보이고, 최고의 웅변은 눌변같이 들린다는 말이 있듯이 완벽한 설법은 언어가 끊어진 무언(無言)의 설법일 것입니다. 《유마경》의 주인공인 유마거사가 설법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이 바로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실은 수많은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문학적인 향취가 가장 높은 경전을 들라고 하면 단연코 《유마경》일 것입니다. 전체의 내용이 그다지 길지 않지만 구성이 매우 극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표현이 정확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불교도가 아닌 일반 교양인들 사이에서도 흥미있게 읽히던 경전입니다.

이 경전의 산스크리트 원본은 산실되어 없고 티베트본과 한역본만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역본은 세 종류가 있는데, 지겸(支謙)이 번역한 《유마힐경》과 구마라집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그리고 현장이 번역한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이 그것들입니다.

또한 ‘내용이 심오한 만큼 《불가사의해탈법문(不可思議解脫法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러도 좋겠다’고 경전에서도 경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통털어서 《유마경》이라 약칭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제일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것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입니다.

그러면 그 구성과 내용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전체의 내용은 3회 14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6 <부사의품>부터 제9 <입불이법문품>에서는 모든 상대적인 개념이 하나임을 역설한 그 유명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이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군데군데 극적인 반전의 묘를 살린 뛰어난 구성이 특히 돋보인다고 하겠습니다.

경명(經名)에 보이는 유마힐은 범어 비말라키르티(Vimalakirti)를 음역(音譯)한 것으로서 이 경전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인데, 이를 번역하면 정명(淨名), 또는 무구칭(無垢稱) 즉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주인공인 유마거사, 즉 유마힐은 부처님 재세시에 비야리란 도시에 살고 있던 거사로서 돈독한 신심과 밝은 지혜 그리고 꾸준한 수행의 실천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거사란 그리하파티(grhapati)의 번역어로서 부호 혹은 덕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는 말인데, 이로 미루어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자본가, 자산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마경》에서는 이 유마거사가 소승의 세계에 빠져 있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대승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꾀병이라는 방편으로써 그들을 대승의 길로 인도해 가려는 의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자, 그러면 다른 경전과는 달리 높은 문학적 향취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심오한 불교교리를 아주 극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몇가지 일화들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마경》은 첫 서두부터가 굉장히 웅장하고 장엄하게 시작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설법을 시작하려는 부처님의 모습을 묘사한 후에 법회에 참석한 대중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8천의 비구와 비구니, 3만2천의 신도, 1만의 바라문교도, 1만2천의 제석천을 비롯한 신들, 그밖에 또 수많은 외도들이라고 하니까, 모두 합치면 엄청난 규모의 대법회를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에 바이살리(Vaisali : 법회가 열린 도시의 이름)에서 제일 가는 부호의 아들 보적(寶積)이 부유한 집안의 자제 500명을 거느리고 나타나 금은보석으로 찬란하게 장식한 일산(큰 우산 모양의 햇빛 가리개)을 각기 부처님께 바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신통력으로서 그 일산들을 하나로 합쳐 엄청나게 큰 일산을 만든 다음, 그 자리에 모인 대중들은 물론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덮어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부처님의 신비로운 능력을 본 대중들은 위대한 부처님의 법력에 새삼 경탄하면서 설법을 기다리는 모습이 《유마경》에서는 화려하고 경건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500명의 청년들이 일산을 바친 것은 각자의 아집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했다는 사실의 은유적 표현인 것이며, 또한 그것으로 하나의 큰 일산을 만든 것은 모든 사물과 현상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진리로 귀결됨을 의미합니다. 경전의 초현실적 서술은 이처럼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토록 웅대하기 그지없는 대법회에 빠질 리가 없는 유마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의 심중을 간파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문병을 다녀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지혜 제일인 사리불(舍利弗)을 위시하여 신통 제일인 목련(目蓮)까지 한결같이 사양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전에 유마거사로부터 수행과 관련하여 질책과 충고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무도 갈 사람이 없게 되자, 대승보살들 가운데 지혜가 가장 뛰어난 문수(文殊)보살이 대표가 되어 여러 대중들을 거느리고 병 문안을 가게 되었습니다.

경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한결같이 유마의 문병을 한결같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 하나 하나가 그 어떤 깊은 교리보다도 가슴에 와 닿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참선은 조용한 곳을 골라서 해야만 한다는 사리불의 분별심을 타파하는 얘기를 비롯하여 다른 아홉 명의 제자들도 사리불과 비슷한 질책을 당하게 되는데, 이렇게 상반된 상황 자체만으로도 읽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통쾌감을 느끼게 합니다.

더구나 지혜 제일인 사리불 조차도 《유마경》에서는 소승적 경지를 뛰어넘지 못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어 기이한 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또 한가지 예로서 문수보살과 유마의 문답을 듣고 있는 대중들의 머리 위에 천녀들이 아름다운 꽃을 뿌려주는데, 이상하게도 보살들의 몸에 뿌려진 꽃잎들은 모두가 땅으로 떨어지고, 불제자들의 경우는 꽃잎이 몸에 붙어서 털어내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꽃잎을 떼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리불에게 천녀는 왜 꽃잎을 털어내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리불은 “수행자가 꽃잎을 몸에 붙인다면 마음이 흐트러져 수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꽃잎은 무엇을 생각하거나 분별하지도 않는데 존자가 분별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꽃잎이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뿐”이라고 질책한 후에, 진리는 사려와 분별을 초월한 곳에 있음을 잊지 말라고 천녀는 충고를 해줍니다.

유마는 자신이 사바세계로 온 것에 대하여 “태양이 세상을 비추는 이유가 암흑을 없애기 위함이듯이, 대승을 믿는 이가 사바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암흑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가장 감명 깊은 ‘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말에서 현대인들의 이분법(二分法)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지성을 읽을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유마거사의 설법은 ‘불이법문’을 통해 더욱 잘 설해지고 있는데 이 유명한 ‘불이법문’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유마는 자신의 병 문안을 온 여러 대중들에게 ‘불이(不二)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고 그들의 견해를 물어봅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각자 의견을 개진하게 되는데 ‘불이’를 주제로 한 일종의 심포지엄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2명 보살들의 의견을 듣고 난 후에 끝으로 문수보살의 차례가 되자, 그는 ‘말할 수도 식별할 수도 없어서 모든 문답으로부터 초월했을 때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문수보살이 ‘불이에 대한 유마거사의 의견은 어떠한 지 설명을 요구하고, 모든 이들의 기대에 가득 찬 시선이 유마거사에로 쏠렸습니다. 그러자 유마는 눈길을 한곳에다 모으고 단정한 자세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저 유명한 유마거사의 ‘우뢰와 같은 침묵’ 즉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는 것입니다.

‘불이’란 언어표현을 초월한 세계라는 것을, 그는 언어표현을 초월한 침묵으로써 완벽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내용을 문수보살은 언설(言說)로서 표현한 반면에, 유마거사는 실천으로 응답하였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유마경》은 대승불교란 출가자에 국한된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특히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란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경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마가 나를 대신하여 진리를 밝힌 것이니 《유마힐소설경》이라 하고, 또 내용이 심오한만큼 ‘불가사의해탈법문(不可思議解脫法門)’이라고 별칭을 지었으면 좋겠다”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아난(阿難)에게 일러 주셨다고 하는 점은 참으로 사실적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알기 쉬운 내용이면서도 경전 속에 담겨있는 사상적인 깊이와 무게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고, 같은 문장이지만 읽어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느끼게 합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자비심이 넘치는 유마거사의 경건한 신심의 세계에 동참하시는 마음으로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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