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스님─남 탓하는 어리석음 벗어나는 ‘참회의 절’

남 탓하는 어리석음 벗어나는 ‘참회의 절’

-지명스님-

절과 무아 수행 자신의 잘못과 업장을 참회하는데 불전에 엎드려 절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듯하다.

이마를 바닥에 대고 모든 잘못을 고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고 많은 장애를 만날 때, 나 밖의 것에 원망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업보로 해석하면서 다겁생의 업장을 참회할 수 있다.

남을 탓하는 어리석음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보통 30만 배, 10만 배, 108배 등의 참회기도를 하는 불자들이 있다.

매일 3천배를 100일 동안 계속해야 30만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보통 결심과 신체적 조건으로는 이런 기도를 계속할 수 없다.

많은 불자들 가운데서 일반화된 것이 108배이다.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행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불보살과 화엄성중의 옹호를 느끼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건강유지에도 큰 도움이 된다.

참회, 기도, 수행 방법으로서의 절이 좋다는 것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사람을 향한 절은 그리 쉽지 않다.

“80된 노 신도라도 어린 사미승에게 절을 해야 한다”고 절집에서는 가르치는데,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신도집을 방문했을 때, 일단 전 가족이 스님께 3배를 올려야 하지만, 그 전통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부부가 사찰을 방문하더라도, 절하는 절차가 귀찮아서 남편은 차에 있고, 부인만 스님을 찾아 절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가족끼리 삼배하면 가정 화합 도모 장애와 우환을 만나는 이들도 필요 절이 스님과 대중간의 편안한 접촉을 막는 한 장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터에, (법공양)이라는 포교용 소책자에서 우룡큰스님의 “가족을 향해 무아의 삼배를” 이라는 법문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무아’ 수행을 “철저하게 하심해서 자기의 아상을 완전히 없애는 것”으로 풀이하고, 가족에게 절하는 것이 무아를 체득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가족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만만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나이 촌수를 가릴 것이 없이 심지어 아들 딸 손자 손녀에게까지 절할 수 있으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절을 할 수가 있고, 그러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원결이나 감정의 앙금이 붙을 곳이 없어서 만사가 편안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나와 인연 있는 여신도들 가운데는 남편을 향해 3배를 해온 이들이 많다.

경험담을 들어 보면, 아무리 깐깐한 성격의 남편이라도, 절을 하면서 절대 존경을 표하면, 마음을 풀고 물렁물렁해진단다.

절에 가거나 고성으로 염불 독경하는 것을 싫어하던 남편들도 마음을 돌려서 부인의 신행을 돕게 된단다.

고3의 아들에게 절을 해서 마음을 잡았다는 경험도 듣는다.

집에서 가족에게 절할 수 있는 사람은 밖에서도 누구에게든지 절할 수 있다.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자기를 한없이 낮출 수 있다.

그런데 가족에게 절하는 수행법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이가 있다.

바로 ‘남자’의 형상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아무리 신심 있는 불자라고 하더라도, 남편이 부인 또는 아들딸에게 절한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여성에 비한 육체적 강함을 남성의 우월로 착각하기 때문일까? 초라한 나에게 절할까 말까 망설이는 “남자”에게 나는 먼저 넙죽 절을 한다.

자동적으로 상대의 절이 뒤따른다.

왜 남자는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절을 하는가? 멋진 남자는 오히려 절을 더 잘할 수도 있을 텐데.

예식장의 신랑들이 맨 바닥에 아무 스스럼없이 엎드리듯이.

가족에게 절할 수 있다면 출가 수행자에게의 절은 더욱 쉽다.

절은 세상을 돌리는 기운의 혈전 용해제와 같으니, 맺힌 것을 풀게 하고 막힌 곳을 뚫리게 한다.

특히 아무런 이유 없이 장애와 우환을 만나는 이들에게 절이 필요하다.

불보살을 향한 절뿐만 아니라 모든 스님네, 가족, 중생을 향한 절은 불가사의하게 업장을 녹이고,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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