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두 가지 모양없는 존재의 참모습

법성게(法性偈) :두 가지 모양없는 존재의 참모습

-법륜스님-

법성게는 불/법/승 삼보 중 법보(法寶)에 속하고, 경/율/론

삼장 중 논장(論藏)에 속합니다.

논장에는 대승의 논장과 소승의 논장이 있는데 법성게는`대승

의 논장`입니다.

그 이유는 법성게가 대승경전인[화엄경]을 기본 경전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장(論藏)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고 쉽게 전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요약하거나 주석을 단 것 중에서,

그 시대의 붓다라 할 만한 선지식의 글을 논장이라 하여 法과

같이 취급합니다.

법성게는 이런 `논장`의 반열에 들어갑니다.

이 「법성게(法性偈)」는 신라의 고승인 의상 조사께서 쓰신

글이지요.

7字로 이루어진 30구절, 그래서 총 210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그 양이 방대

하고 내용이 깊다 하는「대방광불화엄경」을 축약해서 그 진수

를 뽑은 글입니다.

불교는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경전이 있는데, 크게 소승 경전

과 대승 경전으로 나누지요.

대승 경전은 방등부와 반야부, 법화 열반부, 그리고 화엄부의

넷으로 나누는데,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직후 설하신 경전이

이 화엄경입니다.

대중의 근기에 맞게 방편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 3·7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바를 그대로 설하신 것이지요.

이 대방광불화엄경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60권본, 실차난타가

번역한 80권본, 그리고 반야가 번역한 40권본이 있는데,

법성게는 의상 대사께서 60권본을 모본으로 해서 축약해서 쓰

신 글입니다.

중국에 화엄경이 들어오면서 많은 화엄행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서 화엄종은 독립적인 하나의 종파로 성립한 것이지요.

화엄종의 2대 조사로 지엄 화상이 계셨습니다.

의상 조사께서 중국에 건너가서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 지엄

화상입니다.

동문으로 같이 공부하신 분이 현수 대사입니다.

이 현수 대사는 중국 화엄종의 3대 조사로서 화엄종을 뿌리내

리게 하는 데 큰 공로가 있으신 분인데, 그 분께서 오히려

의상 조사를 높이 받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의상 조사께서는 그 내용이 깊고 복잡한 화엄경을 완전

하게 이해하셔서 그것을 이 짧은 시구 속에 다 담았을 뿐

아니라, 끝없이 계속되는 법계도(法界圖)에 210자로 딱 맞추어

그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법`이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성품`은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어서, 존재의 참모습, 진리를

노래한 것이 바로 `법성게`라 할 수 있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법의 성품, 존재의 참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노래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법성이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고,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며 이름도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으니

이것은 깨달음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지요.

또 성품은 극히 미묘하여 스스로의 성품인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법의 참성품, 본래의 성품은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가 보는 세계, 우리가 보는 존재의 모습은 어떠냐?

여러 모양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모양이냐? 존재는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또 사람들의 행동에는 착하고 나쁜 것이 있고 빠르고 느린 것

이 있고, 선한 행위 악한 행위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을 봐도 그래요.

옳고 그른 생각이 있습니다.

또 존재의 모습에는 아름답고 추한 것이 있어요.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고, 신령스럽거나 신성시 여기는 것

이 있는 반면 보거나 만지기만 해도 부정 타는 깨끗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풀에도 약이 되는 것이 있나 하면 독이 되는 것이 있고, 큰

것 작은 것이 있고,넓은 것 좁은 것, 늘어나는 것 줄어드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법의 성품, 존재의 참모습은 두 모양이 없다 하니, 우리가 아

는 것과는 정반대 얘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지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을 말하지요.

불변하는 이치, 존재의 참모습을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상식을 가지고 삶을 살고, 그 상식을 보편 타당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삼아 남과 사회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상식은 옳다고 고집할

만한 불변의 진리인가, 아니면 한 단편적인 생각이고 주관인가.

하나의 주관이라면 그 상식을 잣대로 삼아 옳고 그름을 판단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겠는가?

그렇다면 지혜롭게 사는 삶은 무엇이고 존재의 참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이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얼음 한 덩어리가 있어요.

세 살 먹은 아이에게 얼음으로 구슬을 만들어 돌구슬이나

유리구슬과 같이 주면 어린이는 같은 구슬이라 생각할 겁니다.

얼음 구슬을 포함해서 다섯 개의 구슬을 주면 아이는 자기

구슬이 다섯 개라고 알고 그릇에 담아 놓아요.

그러다가 밖에 나가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다가 한참 만에 방

안에 들어왔더니 구슬이 네 개밖에 없어요.

아이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구슬 하나가 없어졌어.

사라졌단 말이야.

그리고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그런데 누가 물을 부었지?” 구슬이 사라지고 물이 생겼다.

즉 아이가 얼음이 사라지고 물이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은 얼음

따로 물 따로 각각의 존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얼음이나 물이라는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얼음과 물이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얼면 얼음이 된다는 걸 어른들

은 알지요.

얼음 구슬이 사라지고 누가 밖에서 물을 부은 것이 아니라,

얼음이 물로 변했을 뿐, 단지 이 모양에서 저 모양으로 바뀌었

을 뿐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사물을 조금만 관찰해도 무엇이 생기고 사라졌

다는 말은 사실 존재의 어느 한 부분이나 순간에 한정되었을

때만 맞다는 걸 알 수 있죠?

또 존재의 참모습은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아니에요.

같은 떡집에서 떡을 만들어서는 주문한 곳에 배달 갔는데,

한 곳은 절이고 한 곳은 초상집이었어요.

그래서 떡을 똑같이 썰어서 얹어놓았는데, 부처님 전에 올렸던

떡은 신성함이 깃들어 있어 먹으면 재수 좋고, 초상집에 올려

놓은 떡은 먹으면 재수 없어 부정 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면 떡 속에 정말로 신성하고 부정한 것이 있을까?

떡 자체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요.

생각을 일으켜 모양 짓는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생각을 일으켜서 더럽다 깨끗하다, 신성하다 부정하다고 모양

을 짓는 거지, 실제의 존재 그 자체에는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 놓아 버리면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아

니니까 부정 탈 아무 일도 없지만, 그 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그것을 하면 재수 좋고 또는 부정 탄다는 논리가 생겨

나게 되요.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그들 관념 속에는 소는 여자보다도 더 좋은 업을 가졌다고 봐요.

그래서 여자가 죽으면 다음에 뭘로 태어납니까?

소로 태어나고, 그 다음에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쇠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교도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해요.

그래서 돼지고기를 먹게 되면 몸이 더럽혀져서 좋은 곳에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강제로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그 사람들에게 먹이면

죽는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밖에서 보면 소가 신성한 것도 돼지가 부정

한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일으킨 생각이나 관념이지 실제의 소나 돼지

자체는 신성한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이지요.

또 깨끗하고 더러운 것, 아름답고 추한 것도 정말 그 자체에

아름답다거나 추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맛 같은 것은 어떨까요?

전라도에 가면 홍어를 잡아서 푹 썩혀 놓은 음식이 있죠.

그 냄새를 맡으면 그 곳 사람들은 우와, 참 잘 익었다! 이래요,

익숙치 못한 우리가 냄새 맡으면 막 구역질이 날 정도인데

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오징어 냄새나 청국장 냄새 좋아하죠?

미국 사람들은 그 냄새 맡으면 코 막고 야단법석입니다.

우리가 인도 가서 인도 카레 냄새를 맡으면 비위 약한 사람들

은 먹었던 게 올라옵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은 한국에 와서 제일 못 맡는 게 뭐냐?

된장하고 김치 냄새입니다.

그런데 아프다가도 자기들 카레 한 그릇만 먹었다 하면 병이

탁 나아 버려요.

실재하는 존재 그 자체에 아름답고 추하다든지, 맛있고 맛없

는 게 있어요?

우리의 습관, 관념에 따른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그려진 자기 관념이나 습관은 객관적일 수가

있어요?

주관적입니다.

그런데도 이 주관적인 자기 생각을 절대화해요.

마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인양 말이지요.

이 경우 우리가 알고 있다 하는 게 뭐냐?

전도 몽상된 것이지요.

잘못 알고 있다 이 말입니다.

가정 문제도 그래요.

직장 생활하는 거사님의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퇴근하려 하는데, 친구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말을

듣게 됐어요.

그래서 친구를 위로하고 돕기 위해 그 집에서 이야기도 해

가며 같이 보내 줍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옆자리에 근무하던 회사원 하나가 또 아

파서 병원에 입원했다 해요.

그래서 또 병문안 갑니다.

그 다음날은 누구 이사하는데 도와 주러 가.

그러면 사람들은 “이야~, 그 친구 진짜 보살이야, 보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지만 집에 가면 부인은 뭐라

그래요?

“정신 나갔어, 당신?” 이렇게 됩니다.

제가 지난번에 미국에서 `깨달음의 장` 수련을 진행하는데,

저녁 8시에 입재하기로 한 보살님 한 분이 참가한다 하고는

안 와요.

30분 이상을 기다리니까 오셨는데, 이 분이 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자기는 결혼 생활 15년에 아직 한 번도 남편에게 잘못

했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당신 참 고집이 세군요.

하니까,

자기는 고집이 안 세다는 겁니다.

결혼 15년에 잘못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남편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게 왜 고집이냐는 겁니다.

그런데 `장`을 진행하기 전에 차에서 부인을 내려 주면서

그 남편이 저보고 저쪽으로 좀 가자고 그러더니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스님, 여기 와서 며칠 있다 가면 사람됩니까? 이러더라고요.

며칠 있으면 사람 되는지 물어보고 갔는데, 본인은 15년 동안

잘못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했어요.

조금 범위를 넓혀 사회적으로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시비를 가릴 때는 그 기준이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그 기준이 뭐냐?

그 나라의 윤리나 법 이런 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나라마다 다 같아요? 다 다릅니다.

같은 나라에서도 시대나 세대마다 다 달라요.

조선 시대에는 보통 십육칠 세가 되면 결혼했어요.

그래 여자가 스무 살이 넘으면 어휴, 노처녀가 되서 이젠 시집

가기 글렀네.

라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스무 살짜리가 시집간다 하면 뭐라 합니까?

아니 저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벌써 남자 맛을 알아?

이렇게 말한다 이겁니다.

조선 시대에는 여자가 결혼식 올리고 첫날밤도 같이 자지 못

하고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해도 그 집에서 살아야죠.

살지 못하고 딸이 친정으로 오면 친정에서는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냐고 호통치고는 시집으로 되돌려 보냈어요.

그래도 또 오면 `나쁜 여자`가 되고 제발 정신 차려 거기 붙어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서른이 되어 시집가도 그것도 1년 산 것도 아

니고 3, 4년씩 살다 남편이 죽고 혼자 있으면 뭐라 그래요?

아직도 나이가 서른이라 앞날이 창창한데 왜 거기 사냐고?

그래도 집에 안 오고 그 집에 붙어 있으면 부처님한테 기도하죠.

`아이고, 저것이 미쳐서 저기 붙어 있는데, 제발이지 정신 차려

서 다시 시집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요.

부처님이 어떤 기도를 들어 주어야 할까요.

동성 동본 문제도 그렇죠.

조선 시대에는 동성 동본인 남녀가 같이 결혼하면 짐승 취급했죠.

그런데 신라 때는 어땠어요? 왕족인 `성골`은 오히려 다른 성을

가진 사람하고 결혼하면 피가 섞였다,

더러워진다 해서 순수하게 자기들끼리 결혼하면 순종인 성골

이라 하고, 한 번 섞이면 진골이라 해서 계급을 한 단계 낮추

어 차별했어요.

그래서 `존재의 참모습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

는 것입니다.

`

다만 마음이 망념을 일으켜 만 가지 모양을 만들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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