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로 사는 길
-혜거스님-
보살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즘같이 혼탁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바로 보살일 것입니다.
보살이란 보살마하살의 준말입니다.
마하살(摩訶薩)이란 마하살타의 준말로서 대유정(大有情)·대사(大士)라 번역하며 보살의 미칭(美稱)입니다.
마하(摩訶)는 대(大)의 의미입니다.
보살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대원(大願)과 대행(大行)을 가진 사람이므로 마하살이라 하며,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중생 가운데서 맨 윗자리에 있으므로 대(大)자를 더하여 대사·대유정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중생 가운데서 제일 윗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보살, 그것도 대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위로는 도를 구하면서도 아래로는 다른 이를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대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도를 구하는 데에만 전력투구하면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외면하고 무관심해도 대보살이라 할 수 없고, 또 다른 이를 위해서 봉사하고 노력해도 자신을 위해 마음을 닦고 도를 구하지 않아 온갖 일에 탐진치(貪瞋痴)를 일으키고, 남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생색을 낸다면 이 또한 대보살이라 할 수 없습니다.
대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안과 밖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완벽히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보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즉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무주(無住), 무소주(無所住) 즉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자취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어떤 행위를 하고도 집착이 없고 자취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布施)란 단나(檀那)바라밀이라고도 하며 물질로나 법으로나 자기 소유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에는 자비심으로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물건을 주는 재시(財施)와 어리석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깨치게 하는 법시(法施), 그리고 스스로 계를 지켜 남을 침해하지 않고 다른 이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주는 무외시(無外施)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보시는 공덕을 바라고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 주어도 준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시한다는 마음[施者]도 없고 베푸는 물건[施物]도 보지 않으며 받는 사람[受者]도 분별하지 않아야 참보시인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인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보살이 피안(彼岸)에 이르는 방편인 만행(萬行)도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이 중 보시가 으뜸이 됩니다.
나머지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가 그 다음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시 한 가지가 보살의 온갖 수행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마주치는 대상들이 색·성·향·미·촉·법 육진(六塵)인데, 이들은 항상 우리들의 본심을 빼앗고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도적들입니다.
그러므로 보시할 때도 이들 여섯 가지에 머물지 말야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으로 보면 본 것에 집착하고, 소리를 들으면 들은 것에 집착하고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에 집착하고 맛을 보면 그 맛에 집착하고, 접촉하면 그 감촉에 집착하고, 어떤 일을 생각하면 그 생각한 것에 집착하는 등 마주치는 것마다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은 우리를 미혹하게 만들며 한 치도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장애하여 자기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고통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데 조금도 상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이익되게 하는 이런 보살이 많이 나와야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각자가 보살이 되기 위해 열심히 정진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정진력으로 세상을 이익되게 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