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의 갈등

요즈음 스님들이나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종교에 좀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한국의 기독교가 왜 자꾸 종교간의 갈등을 야기하는지, 인간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80년대 들어 신 군부가 반체제 인사들을 찾는다며 군화를 신고 법당에 난입한 ‘법란’과, YS 정권 때 청와대 경내의 불상을 함부로 처리해버린 ‘훼불’사건에 이어, 또 하나의 ‘법란’이라고도 할 ‘봉은사 땅 밟기’는 상식을 벗어난 폭력 행사이기에 아연실색할 정도다.

‘봉은사 땅 밟기’라는 제목의 6분 짜리 동영상은 20~30대로 보이는 남녀들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봉은사 경내 곳곳에서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들어 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경 구절로 시작하는 동영상은 ‘불상, 사천왕상, 돌계단, 탱화’ 등을 보여주며 이를 ‘사람들이 만든 우상들…’이라고 지적하면서 두 손을 하늘로 뻗은 채 기도를 하고, 요사채 기둥이나 불경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사진을 담았으며, ‘주님! 우상은 무너지고 주의 나라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으로 끝난다고 한다.

도대체 이게 순수한 종교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인가. 왜 우리 사회가 이처럼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과 이념이 다르면 배척하는 것인가. 종교 본래의 역할은 망각하고 정복주의적 태도로 무조건 배척하려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밖에 볼 수 없지 않은가. 인간사회를 사랑과 화합으로 이끌어야 할 종교가 사회를 더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해서야 되겠는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찬양인도자 학교’의 최모 목사도 봉은사에 사과하고 ‘우리도 비상식적이고 무례했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고 유감을 표했지만 진정성이 담긴 사과이길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대구 ‘동화사’에서도 ‘땅 밟기’가 있었고, 심지어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미얀마’의 한 사찰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드리는 ‘해외 땅 밟기’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봉은사 법당에서 ‘이곳은 하느님의 땅이다’라고 선포하는 ‘땅 밟기’를 하면 이곳이 기독교의 땅이 되는가 하느님의 땅이 되는가. 최근 들어 불교계와 개신교의 갈등은 이것뿐이 아니다. 템플 스테이 사업에 왜 국고를 지원하는가. 대구 팔공산 불교테마공원(초조 대장경 역사 문화공원) 사업은 시행해서는 안 된다. KTX 울산역 명칭에 ‘통도사’를 부기하는 문제도 ‘울산광역시 역명 선정 자문위원회’와 ‘철도공사 역사 명칭 심의위원회’ 등을 거치면서 투표 끝에 ‘울산역(통도사)’가 확정되어 8월 26일 정부 전자 관보를 통해서 공고된 것을 코레일이 갑자기 입장을 번복한 바 있다.

이런 일에 대해 불교계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11월 2일 종교 평화와 갈등 방지를 위해 ‘종교평화윤리법’(가칭)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른 종교에 대한 폄훼행위를 법으로 규제해서 종교간의 갈등을 없애자는 종교인다운(?) 주장을 하면서 앞으로 개신교계의 ‘훼불 행위’에 적극 대처하겠다고 했단다.

우리나라와 같이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특정 종교의 힘이 급속히 팽창하여 권력화하면 대개의 경우 정치 또는 자본권력과 접목되면서 본질을 잃기 쉽다. 자본주의 논리가 종교에도 파급되어 대형화하고 종교의 이념과 무관한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자기 부정과 자기 비움을 통해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본질에서 멀어질 뿐이다.

일찍이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문명사적 관점에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견하였지만 그 문명의 배후에는 항상 ‘종교’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든다. 이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전쟁 뒤에는 반드시 ‘종교’가 있었다는 점과, 작금의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분쟁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개인이나 사회, 국가, 종교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존중해 줄 때 비로소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중자애 해야 할 것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2월 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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