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바라밀 실천 통한 공사상 설파
이만오천송(二萬五千頌)반야로 널리 알려져
<소품반야경>은 게송 수가 ‘팔천송(八千頌)’인데 비해 <대품반야경>은 ‘이만오천송(二萬五千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일명 <이만오천송반야>라 부르고 있습니다.
– (참고 : 소품반야경은 나중에 올릴 예정임) –
<소품반야경>과 마찬가지로 <대품반야경> 역시 범본과 티벳트본이 있고, 한역으로는 404년에 구마라집이 완역한 <대품반야경>이외에 동본이역(同本異譯)으로 축법호가 번역한(286)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과 무라차(無羅叉)가 번역한(291)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종류가 많다보니까 <소품반야경>과 <대품반야경>의 성립년대와 순서를 놓고 아직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소품반야경>이 성립된 후에 <대품반야경>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라고 하는 견해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소품반야경>이 그 어느 대승경전보다도 제일 먼저 번역되었다는(179) 점에 초점을 맞출 경우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기원 전후로부터 시작하여 기원 후 1세기 중엽까지는 <소품반야경>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대품반야경>은 자연히 그 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현장 스님이 번역한 <대반야경> 속에는 모두가 포함되어 있고 내용상의 차이가 아니라, 분량(偈頌)의 대소(大小)가 다를 뿐입니다. 예를 들면 260자(字)로 된 <반야심경>과 같이 짧은 경전과 600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대반야경>이 모두 반야경전에 속합니다.
그런데 <대품반야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는 단어 자체에다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는 어머니(佛母)와 같은 역할의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반야바라밀 그 자체에 신비한 힘이 들어있어서 이를 염송(念誦)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공덕이 돌아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대품반야경>에서 주목되는 것은 서품(序品) 제1의 내용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반야를 설법하기 시작하시자 삼천대천국토와 시방세계의 중생들은 제각기 “부처님은 오직 나만을 위해 바로 이 법을 설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언변이 뛰어난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가 보면 “혹시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얘기 아닌가?”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설득력을 가지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품에 나오는 이 내용은 그 자리에(會座) 참석한 사람들이라면 한사람도 빠짐없이 각자의 이해 정도에 따라 반야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목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소품반야경>이든 <대품반야경>이든 간에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통한 공사상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육바라밀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시에서 선정까지의 다섯 바라밀을 한 묶음으로 하고 나머지 지혜 바라밀을 한 묶음으로 했을 때, 이 두 가지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지혜바라밀이 다섯 바라밀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보시바라밀을 행한다고 할 때 무턱대고 베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어린애가 떼를 쓸 때,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주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꾸짖는 것이 좋을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마하반야바라밀이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육바라밀을 불교적인 해석을 떠나 시(詩)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님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 배웠노라.
님께 보이자고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웠노라.
님이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忍辱)을 배웠노라.
천하에 많은 사람이 오직 님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禪定)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쉴 새 없이 님을 그리워하고 님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精進)을 배웠노라.
내가 님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님과 나의 존재도 잊을 때에
나는 살바야(一切智)를 배웠노라.
아, 이제야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시라고.”
익히 알고 있는 시 구절이지요. 불교에서 설명하는 육바라밀의 정신을 얼마만큼 잘 반영시키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구사하여 이만큼이라도 육바라밀을 손쉽게 알리고자 했던 춘원 선생의 열정만은 전달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소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