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치

요즈음엔 예술도 상품가치로 평가된다고 한다. 예술품을 화폐가치로 환산하여 그 작품을 만든 작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좀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만 세태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면서도 뒷맛이 씁쓰레하다. 외국의 유명한 경매회사를 통해 한국의 박수근 화백이나 김환기 화백 등의 작품이 높은 값에 거래되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데 정작 예술이 상품가치로 평가된다고 하니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좀더 나아가면 종교나 철학도 상품가치로 평가되지 않을까 두렵다.

이미 과학이나 기술, 의학 등 자연과학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지적재산들이 상품가치로 평가되고, 기업이미지나 상표, 인터넷의 도메인 등도 화폐가치로 환산된 지 오래다. 지난해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황우석 교수 파문도 따지고 보면 국제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파장의 큰 몫을 차지한 것으로 안다.

이처럼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화폐단위로 환산하는 이면에는 옛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비롯하여 우리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근본이 물질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대인의 거의 대부분이 물질주의(物質主義), 자연주의(自然主義) 인생관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 즉 자연이라 보아왔고, 인간을 인간되게 한 것은 육체로서의 자연이며 그때의 자연이란 곧 물질을 의미한 것이다. 넓은 의미의 자연법칙이 인간의 생의 내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육체의 법칙이 생리의 법칙을 이끌어 내고 생리적 조건이 그대로 심리적인 작용의 규범이 된다고 보았다. 이 심리적인 규범 안에서 우리들의 정신은 여러 가지 활동과 사상 내용을 만들어 낸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도덕과 윤리, 학문과 진리도 큰골에 의한 의식작용에 지나지 못하며, 모든 문화ㆍ사상ㆍ학문은 마침내 신체로서의 자연에 달렸다는 주장이다.

19세기 중엽 유물론(唯物論)이 기승을 부릴 때에는 물질 이외에는 존재가 없으며, 이 우주가 물질 및 물체로 되어 있는 것같이 인간도 하나의 물질현상이며 발달된 생물이 곧 인간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에 뿌리를 둔 사조가 물질주의, 곧 자연주의 인생관이며,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부류에는 공산주의ㆍ실증주의ㆍ실용주의ㆍ경험주의ㆍ과학정신론 등이다. 이들의 근본적인 입장은 단순하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나고 자라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며, 물질세계를 어떻게 잘 이용하고 정복할 것이냐에 생의 의미를 두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인간이 인간을 본위로 삼고 인간을 자연의 부속물이나 신의 피조물이 아닌 인간중심주의, 즉 휴머니즘 또는 정신주의 인생관이 있지만 그 세력은 물질주의에 비하면 극히 약하다. 이들의 신념에는 ‘자유와 이성’을 강조하여 자연을 지배ㆍ정복하여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권위’를 위해서는 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는 귀중한 것이며 이성은 거의 만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졌기에 최대의 노력, 최선의 결실이 인간의 행복과 희망과 장래를 약속해 준다고 보았다. 대개 이들은 도덕과 윤리의 신봉자들이 되고, 오늘날 대륙의 철학적 사조로 느끼고 있는 ‘실존주의’가 바로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주의 인생관이나 휴머니즘적인 이상주의 인생관으로서는 유한(有限)에 대한 무한(無限), 유(有)에 대하여 무(無), 생(生)에 대한 사(死)가 우리의 생활과 현실인 이상 종교와 인생관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하겠다.

인간의 삶에 물질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처럼 자유와 이성의 정신세계를 뺀다면 이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에다 인간의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대도 저버릴 수 없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는 것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의 태도 즉 가치관을 견지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함이 아닌가.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4월 제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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