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 예방

서울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보다가 안타까운 기사 하나를 읽었다. 노부부가 말다툼을 하다 76세의 할머니가 83세의 할아버지를 각목으로 때려죽인 사건이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할아버지가 치료를 거부하고 병원을 나와 버리자 ‘고집부리지 말고 제발 치료 좀 받으라’는 할머니의 말이 듣기 싫다고 역정을 내다가 할머니가 계속 치료 받기를 종용하자 화가 난 할아버지가 먼저 주먹으로 할머니를 때렸다. 이때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생애를 돌아보며 이 나이 들도록 맞고 살아온 과거의 행적들이 떠올라 갑자기 치가 떨렸다. 방을 뛰쳐나간 할머니는 헛간에서 기다란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고 들어와 사정없이 할아버지를 마구 두들겨 패었다. 얼마 사이에 일어난 우발적인 일로 할아버지는 그만 절명하고 말았다.

경찰서에 잡혀간 할머니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울고 또 울었다. 졸지에 영감을 죽인 살부殺夫의 아낙이 되어 자신도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20살에 시집을 왔던 이 할머니는 결혼 초기부터 맞고 살았다. 남편이 술만 먹으면 폭력을 행사해 어떤 때는 이웃집으로 도망을 가, 피해 숨어있기도 하였다. 딸을 일곱이나 낳은 할머니는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낳는다고 구박을 받으며 맞고 살았다. 그러다 늦둥이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그렇다고 남편의 폭력은 없어지지 않았다. 걸핏하면 부인을 북처럼 생각하는 남편을 그래도 섬기고 살아왔다.

그런데 일흔 여섯의 나이에 또 맞았다. 이렇게 평생을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온 할머니가 드디어 자신도 모르게 맞고 살아온데 대한, 뭉쳐 있던 한이 폭탄처럼 터져버린 것이다. 할머니의 독백은 “이 나이에도 내가 맞고 살아야 하나?”였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폭탄을 하나씩 안고 산다. 맺혀 있는 한(恨), 증오, 부아가 폭탄이 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가 되어 살고 있다. 비록 성품이 온순하고 착한 사람이 있다 하여도 그에게도 폭탄은 있다. 중생의 마음속에 선과 악의 업인이 동시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폭탄이 터지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핀은 없을까? ‘참으면 되지.’ 하는 책임성 없는 상투적인 말 외에는 없는 것일까?

배고프면 밥을 먹듯이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이 이젠 사람이 생리적으로 해야 할 게 하나 있다. ‘남을 화나게 하지 말라.’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제일의 계율 조목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자존심을 건드려 기분이 나쁘게 해 화를 내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 나아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생활 헌법(?) 제1조다. 바야흐로 폭탄의 시대에 있어서는 사람을 폭탄처럼 조심해 상대해야 한다.

얼마 전 뉴스에서는 아버지의 권위로 아들을 꾸짖던 어느 가정에 방화사건이 일어나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다 죽은 일이 보도되었다. 이제는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어떤 면에서는 폭탄을 다루듯 해야 한다. 잘못 건드리면 터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함을 지르거나 야단을 치던 시대는 끝났다. 차근차근 설득하고 타이르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그 보다도 귓속말로 속삭이듯이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느 시대이건 인생살이는 ‘역경계’와 ‘순경계’가 있다. 다시 말해 내 기분에 맞고 안 맞는 좋고 싫은 게 있다. 내가 좋아한다고 남이 따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싫어한다고 남도 그런 것은 아니다. 남을 대할 때는 남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의 마음에 있는 기분은 전혀 내 기분과는 다르다는 것, 이것을 미리 알고 남을 대해야 한다. 내 기분대로 일방적으로 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생존의 무게만 더해가는 메마른 시대를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폭탄을 품고 있는 터지지 않은 화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삶의 비극이다.

그대의 가슴에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서 인생관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내 행복이 불행일 수 있고 내가 당한 불행이 행복일 수 있다는 행복과 불행을 등치시키는 일이다. 어디 인생이 웃으면서만 살아질 수 있던가? 웃는 때가 있으면 우는 때도 있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것이 인생이다.

기쁜 것도 내 마음이요, 슬픈 것도 내 마음이다. 슬픔을 느끼는 마음이나 기쁨을 느끼는 마음이나 그 마음이 똑같다는 사실을 알라.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올 줄 알면 되는 것이다. 본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는 마음이다.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는 마음이다. 이 마음을 선수행에서는 ‘무심(無心)’이라 한다. 범부의 감정을 두고 말할 때 이 마음은 ‘잠자는 마음’이다. 화가 날 땐 차라리 마음을 잠재우라. 이것이 폭탄을 제거하는 안전핀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1월 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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