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남쪽에 여산(廬山)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은 경관이 수려한 명산으로 알려져 역대의 많은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린 곳이다.
향로봉, 오로봉, 자소봉, 철선봉 등 40여개의 봉우리가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 당대(唐代)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이곳을 드나들며 시를 지었으며 백낙천(白樂天) 역시 유애사(遺愛寺) 부근에 초당(草堂)을 지어 머물기도 하였고, 송대(宋代)에도 소동파(蘇東坡)가 여산을 소재로 오도송(悟道頌)라 칭송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廬山煙雨浙江潮(여산연우정강조) 여산의 실안개 비 정강의 물결이여
未到千般恨不消(미도천반한불소) 와 보지 못했을 땐 온갖 한이 남더니만
到得還來無別事(도득환래무별사) 와서 보고 나니 아무 별것 없고서
廬山煙雨浙江潮(여산연우절강조) 여산의 실안개 비 절강의 물결이네.
여산에 안개비 내리는 풍경과 절강의 강물을 읊은 이 시가 선을 참구하여 체험한 도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오도의 경지를 읊었다고 찬탄 받은 시이다. 여산의 경치를 소문만 들었을 적에 가보고 싶어, 가보지 못한 것을 탄식했는데 가서 보고 나니 별것 아니더라는 말로, 굳이 덧붙이자면 깨닫고 나면 깨달은 것이 별 거 아니란 뜻이다.
보기 전이나 보고 난 후의 여산의 경치가 그대로이듯이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의 나의 정체도 아무 변화가 없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여산은 동진(東晋) 시대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던 곳이다. 동림사를 위시해서 서림사, 천불사, 개선사, 만장사 등 산속에 70여개의 사찰이 있어 명실공이 강남 불교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불교의 역사에서 보면 일찍이 안세고(安世高)가 이곳에 머문 적이 있으며, 그후 도안(道安)법사가 머물었고 그의 문인 혜영(慧永)이 이곳에 와 서림사(西林寺)를 짓고는 혜원을 청해 오게 해 혜원이 당시 자사 환이桓伊의 도움을 받아 산의 동쪽에 동림사(東林寺)를 지었다. 이 두 절을 여산 이림(二林)이라 했는데 이 절들에 얽힌 많은 설화가 전해지게 되었다.
동림사는 향로봉 아래에 위치해 주변 경치가 뛰어났으며, 근처에 폭포가 있는 계곡이 있었다. 이 계곡에 자주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으므로 호계(虎溪)라 불렀다. 혜원은 이 절에 선림을 세우고 서역지방에 있는 불영굴(佛影窟)을 모방해 불영당(佛影堂)을 조성하였다.
그 뒤 이곳에서 염불 삼매를 닦는 모임을 만들어 염불 수행에 힘썼다. 이를 후대에 벽련사(白蓮社), 혹은 백련결사(白蓮結社)라 불렀다. 이는 사영운(謝靈運)이 이곳에 와서 연못을 파고 흰 연꽃을 심었기 때문에 불러진 말이라고 한다. 이후부터 동림사는 정토종의 발원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나라 때에 와서 무종때 회창법란(會昌法難)을 만나 절이 황폐화 되었다가 선종(宣宗) 때 다시 복원이 된다. 당의 선도(善導) 대사가 이곳에 와 혜원의 유적을 찾기도 했으며, 지순(智舜)은 이곳에서 정토삼부경의 하나인 [관무량수경]을 강의 하였다.
원나라 때는 보도(普度)가 이곳에서 [여산연종보감(廬山蓮宗寶鑑)]을 저술하였으며, 일본에 정토종의 교의를 전한 감진(鑑眞)이 일본에 가기 전에 여기서 연종 교의를 연구하였다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토의 사적이 동림사에 남아 있는 것은 혜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혜원은 당시의 명사들의 내방을 맞이하여 숱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는데 한 번은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이 찾아와 담론을 나누었는데 혜원이 이들을 배웅을 하다가 절 앞의 호계에 있는 다리를 넘지 않기로 서원을 세웠는데 배웅하면서도 이야기에 팔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다리를 건너버렸다.
이때 계곡 안 쪽 산에서 우는 호랑이 울음소리에 정신이 들어 다리를 건너버린 줄을 알고 혜원이 웃자 세 사람이 함께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있는데 이를 두고 호계삼소(虎溪三咲)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나중에 이 말은 선가의 공안(公案)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4월 1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