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붙이고 정 떼기

얼마 전에 내가 사는 암자에 누가 기르던 애완용 개 한 마리를 버리고 갔다. 어떤 젊은 주부인듯한 여성이 개를 데리고 와 정자에 놀다가 개를 두고 그냥 가버렸다는 것이다. 주인이 깜박 잊고 미쳐 개를 데리고 못간 것이 아닌지 하고 혹 찾아 올려나 기다렸으나 주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우리 절 식구들은 이 개를 주인이 일부러 버리고 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실제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 개를 키우다가 집 밖에 갖다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인 잃은 이 개는 절에 있는 것이 좋은지 우리 절식구들 아무나를 보면 꼬리를 흔들며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공양간에 있는 송지월이 개가 불쌍하다고 밥을 챙겨주고 했더니 며칠을 잘 놀고 지내고 있었다. 무척 순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개였으나 안 키우던 개를 절에 두고 있기가 내키지 않아 파출소에 갖다 주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마침 어떤 노보살님이 키우겠다고 데리고 갔다 하였다.

그런데 이 개가 절에 일주일 넘게 있었는데 한 번도 짖지를 않고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이 점을 두고 나는 개가 온순하여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했다. 누가 설명하기를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개를 키울 때 이웃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 개가 아예 짖지 못하도록 성대를 제거해 버리고 키운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나는 처음 들었다. 이 말은 들은 나는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짖지 못하는 개를 만들어 그것을 데리고 예뻐하다가 싫증나면 갖다 버린다니 왠지 취미치고는 알 수 없는 취미인 것 같았다. 정 붙여 키우던 개를 왜 버리고 갔는지? 하기야 꽃도 병에 꽂아 두었다가 시들면 갖다 버리니 개라고 못 버릴 것 없지 않느냐 할런지 모르지만 식물과 동물이 똑같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꽃은 시들면 쓰레기가 될 수 있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동물을 쓰레기처럼 취급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이번 일을 통해서 나는 사람의 마음에 정 붙이고 정 떼는 일이 예사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세속적으로 흔히 하는 말이지만 사람은 정 때문에 산다고 한다. 사람의 가슴엔 언제나 정이 서려있다. 불교에서는 중생은 마음에 정을 갖고 산다 해서 정식(情識)이 있는 존재라는 유정(有情)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정 붙이고 정 떼는, 이것이야말로 증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을 잘 붙여야 한다. 정을 잘못 붙이면 결국 내 인생이 틀리게 된다. 정을 붙이는 대상에 따라서 사람의 의식이 달라지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개를 좋아하다 보면 개에게 깊은 정을 주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러다 보면 개가 사람보다 더 좋아지는 수가 실제로 생긴다.

수년 전에 입적한 숭산스님께서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다.

참선수련회를 열던 어느 때 가끔 절(선센터 : zencenter)에 오는 미국인 아가씨 한 사람에게 수련회 참석을 권유하였더니 “자기가 키우는 개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개를 데리고 와 참선 시간에는 절의 후원에 맡겨 두고 정진시간에만 정진하면 된다”고 하였더니 “그래도 되요?”하고는 선 수련을 시작하는 날 개를 데리고 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쉬는 시간만 되면 개를 안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3일간 참선 수련이 계속 되었는데 둘째 날 이 아가씨의 오빠가 절로 전화를 해 와 이 아가씨를 찾았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으니 빨리 와 보살펴 드리라는 부탁이었다. 오빠의 전화를 받은 이 아가씨는 자기는 개 때문에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오빠가 다른 사람을 고용해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었다. 숭산스님은 <선의 나침반>이란 책을 내어 이 이야기를 소개 하면서 농담 같은 말을 덧붙였다. 개에 대한 의식이 너무 지나친 이 아가씨는 죽어서 개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이런 토픽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미국의 어떤 여성 부동산 업자가 개에게 125억원의 재산을 상속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동물애호가들이 동물 학대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연 사람이 사람 아닌 동물에게 재산을 상속시킨다는 것이 정당한 처사인지는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사람이 왜 지나칠 정도로 동물에게 정을 쏟을까? 사회 심리학자들은 이를 인간 소외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지고 동시에 자신에 대한 외로움과 허전함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편하게 정 붙일 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만족의 정신적 돌파구를 찾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여성들이 애완용 개 등을 데리고 외출을 하는 일은 이제 생활 풍습처럼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는 시민들이 개똥을 치우는 세금을 낸다는 말도 수년 전 파리에 갔을 적에 들은 적이 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개와 고양이가 어린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눈에 뜨인다고 한다. 문제는 일시적인 감정에 도취되어 인륜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우선주의가 아닌 동물 우선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참된 마음에서 우러난 순수한 정은 자신의 참 마음 그대로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을 뗀다는 것은 방편으로 자립을 도와주는 수단으로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정을 뗀다는 것은 순수한 정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런 법문이 있다.

“무정으로써 유정을 대하고 무심으로써 유심을 대하라 (以無情對有情 以無心對有心).”

“떨어진 꽃잎은 정을 갖고 물을 따라 흘러가지만 흐르는 물은 아무 마음 없이 떨어진 꽃잎을 보내 주누나 (落花有意隨流水 流水無心送落花).”

확실히 잘못 쓰는 정보다 무정이 나은 것이고 무심이 좋은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0월 제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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