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가 내 일생이라면

하루살이란 벌레가 있다. 수명이 하루밖에 되지 않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 짧은 수명을 누리는 것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말이지만 사실은 초명이라는 벌레는 소가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사이에 일생을 마친다 하여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생애를 누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짧은 생애를 누리는 미충들의 이야기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무리 긴 수명을 누린다 해도 죽음의 순간에는 지나온 생애가 하루살이의 생애인 것이다. 일기무상(一期無常)이라는 말처럼 일정한 기간을 존재하는 시간전체가 바로 무상한 것이어서 찰나와 같다고 한다.

사람이 하루살이를 보고 이렇게 말을 했다.

“너는 하루밖에 못사는 목숨을 가지고 무엇 하러 태어났느냐?”

사람의 생애가 하루살이에 비해 길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하는 말이었다. 이때 청산(靑山)이 사람을 보고 핀잔을 주면서 말했다.

“야, 이 인간아, 네 목숨인들 하루살이와 다를 게 뭣이 있나? 나와 네 수명을 비교해 보자.”

이에 인간이 대꾸를 못하고 기가 죽고 말았다고 한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대해서 그것이 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긴 시간에 대해서는 오히려 지루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시간의 장단이라는 것이 사람의 의식에 의해서 느껴지는 관념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생멸심이라 하는데 이 생멸심에 의해 시간의 장단이 느껴질 뿐 생멸심을 여읜 선정을 이루고 있는 마음에서는 시간의 장단은 없다. 다시 말하면 번뇌가 있는 마음에서는 길고 짧음의 시간의식이 일어나지만 삼매에 든 상태에서는 시간을 느끼는 의식이 없어져 시간을 초월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치 잠을 자는 사람이 잠 속에서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다가 깨어나서 내가 얼마만큼 잤구나 하고 인식하는 것과 같다.

‘한 생각이 만년’(一念萬年)이라는 선어록(禪語錄)에 나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일념이 곧 무량겁’이라는 법성게(法性偈)의 구절도 있다. 순간이 영원이고 영원이 순간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치에서 보면 하루살이나 초명의 생애가 사람의 일생과 같은 것이며 나아가 천년만년의 수를 누리며 장수하는 목숨과 다른 게 없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다만 업식(業識)이 일어나는 상태에 따라서 시간의 차원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듯이 꿈속에서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깨어보니 부엌에서 짓고 있던 조밥이 아직 다 익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정신 분석가들은 사람이 잠을 자다 꿈을 꾸는 것은 실제로 몇 초 사이에서도 일어난다고 한다. 몇 초 사이에 꿈이 꾸이면서도 몽경(夢境)에서는 하루가 지나는 긴 시간의 일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바세계에서의 시간은 중생들의 업보가 들어있어 겁탁(劫濁)이 되어버린다. 이 겁탁 때문에 불행한 일들이 생긴다고 한다. 예를 들면 전쟁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돌며 천재지변에 의한 재앙이 일어나는 이유가 겁탁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사고와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일들, 또는 세계적인 재해 등이 시간이 오염된 결과라는 것이다. 반면에 이 시간의 오염을 해소하는 일은 무상(無常)을 깨닫고 한 생각 시간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무상을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는 감상적인 생각이 아니다. 친한 친구의 죽음을 보고 받는 충격이 무상을 느끼는 계기는 될 수 있지만 무상을 깨닫기 위해서는 내 한 평생의 생애가 설사 100년이 된다 하여도 하루살이의 하루생애와 같다는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찰나무상(刹那無常)을 통해 일념의 망심을 벗어나 생멸심에서 진여심(眞如心)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을 제도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내 생애가 하루살이와 같은 하루의 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고 가정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쓰레기를 버리듯이 자신을 포기하고 팽개쳐버리면 되는 것일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되는 것인가? 모르긴 해도 아무튼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지내는 하루의 의미보다 생애 전체가 하루뿐이라면 그 하루는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는 가장 의미 깊은 최고의 하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렇게나 보내버리는 무의미한 시간이 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될 것이란 말이다. 한 번 뿐인 마지막 하루를 통해 내 일생의 가장 높은 행복의 가치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1월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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