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의 일주일

“들으면 머리에서 잊혀지고, 보면 마음에 새겨지고, 만져보면 몸으로 이해한다.” 매년 한두 차례 우리 여행팀을 안내해주는 여행사의 일정표 첫머리를 장식하는 글귀다.

올해 여름 여행의 목적지는 ‘비단길[絲綢之路, 실크로드; Silk Route, Silk Road]’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비단같이 아름답고 고운 길인 줄로 착각할까 두렵다. 정작 가보면 끝없는 사막과 군데군데 자리 잡은 오아시스 마을이 전부다. 우리나라에서 하지를 갓 지나고 갔으니 북위 45도를 넘나드는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이곳의 일기예보도 매일 기온이 섭씨 35도에서 45도 정도였다.

실크로드. 지금부터 1천5백여 년 전, 비단 무역을 계기로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상과 해상의 교통로를 총칭하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가고자 했던 이 실크로드는 인류의 동경과 이상과 욕망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개척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벤’이 처음으로 ‘Silk Road’라 명명한 이 길은 중국 중원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사막의 남쪽과 북쪽을 따라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고원을 지나 지중해의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당시 동양문화의 중심인 중국 ‘장안(長安, 시안; 西安)’과 서양의 중심인 ‘로마’를 연결시킨 동서양의 교역로이자 정치 문화의 혈관이었다. 이 길은 크게 동쪽의 중원에서 ‘돈황(敦煌)’까지와, 중앙 부분인 돈황에서 파미르고원동쪽 구간, 신라의 ‘혜초’스님이 “죽은이의 뼈를 이정표삼아 넘었다”고 한 ‘쿤제랍패스’ 서쪽 구간으로 나누는데 이 여름 우리의 목적지는 실크로드의 중앙부분인 셈이다.

부산에서 북경까지 2시간, 북경에서 신강성의 ‘우루무치’까지 비행기로 5시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시작한 관광은 천산(天山), 트루판(吐魯番), 선선(鄯善), 하밀(哈密), 돈황(敦煌), 양관(陽關)으로 이어졌다. 사막과 사막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마을에서 1주일을 지낸 셈이다. 지구상에서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내륙이라 평생 바다 구경을 못해보고 죽어간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사막이라 하면 우리는 해수욕장이나 강가의 곱고 가는 모래밭을 연상하겠지만 ‘명사산’이나 ‘쿠무타크 사막공원’을 제외하곤 자갈과 모래와 흙이 뒤섞여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런 사막을 ‘거비사막’우리가 알고 있는 ‘고비사막’은 ‘지역’의 개념이지만이라 했다.

이런 척박한 사막에 길이 열린 것은 중국 전한(前漢, BC206―AD25) 때의 일이라고 한다. 한무제(漢武帝)는 대월지, 오손과 같은 나라와 손잡고 북방 변경지대의 흉노를 제압하고 서역으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두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로 파견하여 서방 각국과 사절을 교환하고 문물의 왕래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관문 ‘양관(陽關)’의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장건’의 동상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누가 왜 이 길을 열었는가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에 불교를 전래하고 불교문화를 꽃피운 과정에서 ‘실크로드’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확실한 증거가 ‘화염산 천불동’과 ‘고창 고성’에 있고, 그 백미(白眉)가 ‘돈황 막고굴천불동’이었다.

‘막고굴’은 돈황현 동남 25km의 명사산에 있지만 이곳 역시 도시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자갈과 모래로 된 불모의 사막 지대다. ‘돈황석굴’은 왕모래가 진흙 등과 섞여 이루어진 역암이어서 불상을 조각할 수도 없고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벽화를 그렸고, 공간에 따라 강바닥에서 채취한 흙을 이겨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16km 길이의 절벽 면에 492개의 굴이 남아 있다. 이 굴속에 채색된 소상 2400점, 벽화가 4500평방미터가 있으니 가히 불교예술의 정수를 담은 세계적 보고인 셈이다.

수천의 석굴, 불상, 벽화가 사암, 퇴적암 등의 동굴 속에서 진리를 말해주고 역사를 들려주고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었다. 화가나 조각가이기 이전에 수행자가 되어 무아의 경지에서 혼을 불사른 선인들의 모습이 줄지어 떠올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 개가 넘는 굴속에 새겨진 작품들이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기법, 다른 재료로 만들어져 이 또한 불교미술의 경연장 같았다.

앞서 들렀던 화염산의 천불동에서 차례로 들렀던 39번굴, 33번, 31번, 27번 등에서 벽화나 불상 어느 것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남은 게 없어 얼마나 속상해 했던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훼손에다 홍위병들이 황토로 덧칠을 하여 철저히 파손된 불교문화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였는데 이 곳 막고굴을 보면서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 옛날 이 사막을 가로질러 오간 대상들이나 사신, 군사들이 막고굴을 지나면서 예배하고 쉬어가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얼마나 위안을 받고 피로를 푼 뒤 모랫길로 떠났을까. 그 중에 한분, 신라의 ‘혜초’스님도 이 길을 걸어 인도까지 목숨을 건 구법 나들이를 하시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기신 것이 바로 이곳 17굴에서 발견되지 않았던가.

지금은 텅 비어 희미한 벽화 흔적을 보면서 합장을 하고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일주일 동안 헤매면서 인간 뿐 아니라 생명체의 끈질김, 진리의 영속성, 예술의 영원성을 다시금 되뇐 것 같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8월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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