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더미 속에서도 꽃은 핀다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꽃이 피듯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눈먼 중생들 속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지혜의 꽃을 찬란하게 피운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들고 세상을 비추는 자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지혜로써 살고 지혜로써 죽는다. 삶과 죽음의 덧없는 세계에서 범부들은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나고 죽음을 벗어나 꽃의 향기처럼 지혜를 풍기며 깨달음의 길을 묵묵히 간다.

『법구경』에 나오는 이 말은 수행자의 정신을 꽃에 비유하고 등불에 비유하여 읊어 놓은 말이다. 세상의 혼탁이 쓰레기 더미 같다하여도 그 더미 속에서 꽃이 핀다는 말은 상징성이 매우 높게 들린다. 꽃처럼 향기롭게 살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 이 법문이 새삼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 주는 청량제처럼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점점 오염된 분위기가 가중돼 청정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이 지구촌의 환경이 매우 불우하다. 평화롭게 사는 온화한 모습보다는 사람들의 패싸움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국제적인 세계 전체의 사정이나 나라 안의 사정이나 정말 안녕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사바세계를 고해라고 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속성이 으레 그런 것이라고 보고 말면 그뿐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있어야 하고 우리들 마음을 맑게 해 주는 희망적인 이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푸른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다. 먼지 낀 땅이 비록 우리들 삶의 현장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보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런데도 요즈음 “당신은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늘을 쳐다보고 사느냐?”하고 물어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 말은 정신적으로 맑은 심성의 공간을 폐쇄해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이 원초적 물음을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던져 보아야 한다.

서양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생이란 결국 무덤으로 가는 행진’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범속한 세속경계에서 너무 숨막히는 생활에 빠져 마음의 여유와 지혜를 상실해 가는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다. 찾아야 할 돌파구는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 지혜로운 용심을 하는데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방안에 날아 들어온 벌이 열려 있는 문을 찾지 못하고 닫힌 창에 몸을 부딪치는 어리석음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로에 지친 자에게 갈 길이 멀 듯이 어리석은 자에게는 나고 죽는 생사의 길이 멀다. 바른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법에 대한 향수, 진리에 대한 동경을 가진다. 타향살이하는 사람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처럼 영혼의 눈을 뜨는 사람에겐 영혼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을 발심하여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시그널이다. 이 길을 가서 생사의 강물을 건넌다.

끝없이 윤회하는 업보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한 줄기 빛이 되고 향기가 되어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듯 승화해 가는 곳이 부처님의 세계다. 아우렐리우스도 이렇게 말했다. “하루하루를 자신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여 흔들림없이 최선을 다해 살라. 그것이 바로 그대의 인격에 어울리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오히려 삶의 의미가 더 깊어지는 법이다.

지안스님 글 / 월간반야 2003년11월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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