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한다. 나라마다 식사법이 달라 서양 사람들은 포크나 나이프 등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밥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는 대부분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다. 숟가락에 밥을 떠서 입에 넣어 이를 씹으면서 맛을 느끼며 식도락을 즐기는 것이 사람의 식사다. 먹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몸을 유지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일에 앞서 식사를 먼저 하는 것이다. “식사를 하셨습니까?” 하는 인사말은 “일 할 준비가 되었습니까?”라고 뜻을 바꾸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가 있어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식사가 우선이다. 먹는다는 본능, 이것이 가장 시급한 일차적인 생존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일차적인 생존의 문제가 걸린 식사가 맛을 즐기는 식도락의 차원으로 발전해 음식의 고급화를 추구해 온 것 또한 문화나 문명의 발달의 한 페이지이다. 더구나 경제의 지수가 높아진 시대에 와서 음식의 값도 엄청나게 높아진 것들이 있다. 서울의 어느 고급호텔의 식당에는 일인분 식사대가 20만원이 넘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밥 한 끼에 20만원이라면 하루에 60만원, 한 달에 18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매일 그러한 고급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의 고급화에 편승해 식사도 비용지수가 그만큼 높아진다는 이야기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가치비중의 제고에 의해 향상일로를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목하 우리 사회는 수많은 가치의식이 범람하여 매우 혼란스럽다. 사람 사는 생활에 있어서도 서로 추구하는 취향이 다르고 삶의 의미를 다르게 느끼고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A에게는 아무 의미 없고 몰가치한 것이 B에게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며 그것 없이는 못산다고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래서 가치의식의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가치의식이란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나 여기에도 보편적이고 타당하다고 자타가 수긍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일방적 편견으로 주장하는 가치는 개인의 사사로운 영역을 넘어서 보편화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음식에 미각을 느끼는 것이 다르고 선호하는 음식이 다르듯 개인의 사사로운 가치 의식이 무시될 수는 없어도 개인의 사적인 의식이 우선적으로 앞서 공적인 것에 반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주장하는 가치의식 때문에 남에게 피해가 끼쳐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의식이 앞선다는 것은 곧잘 남으로부터 도전을 받는 뜻하지 않는 복병을 만나기도 한다. 사람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오래된 것이며, 자기화 된 것이듯이 때로는 사람 일이 무의식적으로 행해질 때가 더 좋은 수가 있다. 이것을 선수행에서는 무심도리(無心道理)라 한다. 번뇌가 가라앉은 무심의 경지에서는 자기 하는 일은 자기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독서삼매에 든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읽는 줄 모르고 읽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른바 무아지경에서는 주위가 의식되지 않고 한 생각에 머물러 주객의 대립이 쉬어져 버리기 때문에 삼매 속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도 “국을 퍼는 국자는 국맛을 모른다.” 말이 있다. 숟가락은 밥맛을 모른다는 말과 똑 같은 뜻이다. 일을 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삼매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밥맛이나 국맛을 모른다는 것은 정신일도가 되어 맛을 느끼는 의식의 운동이 중지되었다는 뜻과 반대로 어떤 일을 하여도 왜 그 일을 하여야 되는지 본뜻을 깨닫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면서 자각을 못한다는 두 가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나는 무위심(無爲心)으로 함이 없이 한다는 주객의 대립을 벗어난 마음을 말하고 또 하나는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불각심(不覺心)을 경책하여 자각을 환기시키는 말이 될 수 있다. 한 편 나 아닌 남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괴로워 질 때 사람의 입속에 밥을 떠 넣어 주면서고 밥맛을 모르는 숟가락처럼 한결같이 남을 위해만 주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면 이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 부처님이나 보살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무엇이든 쉴 새 없이 무심히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09년 9월 1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