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나’이므로 ‘나’아닌 게 없다

‘나’이므로 ‘나’아닌 게 없다 -월호스님-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로다. (信心不二요 不二信心이니 言語道斷하여 非去來今이로다.) – (신심명) 어떤 큰스님께서는 손님이 오면, 후원의 소임자를 불러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나와 한 고향 출신이다. 잘 대접하도록 하여라.” 큰 스님과 동향출신이라는 말을 듣고는 최선을 다해 손님을 모셨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거의 오는… 월호스님─‘나’이므로 ‘나’아닌 게 없다 계속 읽기

월호스님─’해주세요’ 말고 ‘하겠습니다’ 기도해야 이뤄진다

‘해주세요’ 말고 ‘하겠습니다’ 기도해야 이뤄진다

-월호스님-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월호 스님(행불선원장)은 7월 7일 통도사 극락암 분원 원오사에서 ‘삶은 판타지다’를 주제로 법문을 진행했다.

스님은 보시공양으로 복덕을 쌓는 바른 수행을 실천해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참된 불자의 길을 걷자고 설했다.

#부처님 ‘가장 높은 절대적 깨달음’ 얻은 분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시며, 바르게 모두 아시는 분이시며, 지혜와 실천을 구족하는 분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시며, 세상을 잘 아는 분이시며, 가장 높은 분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이시며, 신과 인간의 스승이시며, 깨달으신 분이시며, 가장 존귀한 분이시다.” (법구경) 삼보에 대한 명상 초기경전인 (법구경) 중 삼보에 대한 명상 가운데 부처님을 칭송하는 열 가지 이름에 관한 부분입니다.

여래십호란 부처님을 일컫는 10가지 이름으로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邊知), 명행족(明行足 ),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 이상 10가지입니다.

‘응공’은 응수공양(應受供養)에서 온 말로 깨달음을 얻었기에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응공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르하뜨(Arhat)’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아라한이나 나한이라는 말과 뜻을 같이 합니다.

‘정변지’는 우주 만물의 모든 이치를 완전하고 바르게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명행족’은 깨달음의 지혜와 그 실천을 함께 갖추신 분, ‘선서’는 고통스런 생사윤회의 강을 건너가신 분을 뜻합니다.

‘세간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완전하게 이해하신 분이며, ‘무상사’는 그 어떤 것보다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조어장부’는 대자대비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분, ‘천인사’는 하늘의 신과 중생의 스승을 의미하고, ‘불세존’은 불은 깨달은 사람, 세존은 중생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결국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반야심경) 중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부처님의 두 가지 이름인 무상사와 정변지를 뜻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얻으신 최상의 절대적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부처님을 아뇩다라 삼막삼보리 따타가타, 즉 무상정등각 여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최상의 절대적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쓰이는 등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존경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입니다.

삼보란 무엇일까요.

‘불법승’은 진정한 보배입니다.

세속의 보물인 다이아몬드, 루비, 진주 등이 보배가 아니라, 붓다(Buddha, 부처님), 달마(Dharma, 가르침), 상가(Sangha, 스님)가 최상의 다이아몬드 귀걸이이며 루비 목걸이이고 진주 반지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드는 불자라면 부처님이라는 목걸이를 하고, 가르침의 귀걸이를 걸고, 부처님의 십대제자를 손에 지니고 다니는 셈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한 번이라도 부처님이라는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입니다.

지구상에는 65억의 인구가 사는데 그 중에는 평생을 살아도 부처님 이름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지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을 섬기는 종교이고, 또 하나는 신이 섬기는 종교입니다.

전자는 종을 만드는 종교이고, 후자는 주인을 만드는 종교겠지요.

세상에 신을 믿는 사람은 많지만 신들의 스승인 부 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종교는 단 하나 불교 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을 섬기지만, 불교는 신들이 섬기는 종교라는 설명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법당에서 불보살과 부처님의 제자 아라한은 상단에 모셔져 있고, 신은 중단, 영가는 하단에 모시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생전에 마음공부를 잘해 번뇌에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신들보다 더 높은 상단에 오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영가단에서 신중단, 그리고 신중단에서 상단으로 오를 수 있을까요.

부처님 생전의 일화에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어느 마을에 지독하게 가난해 이름마저 극빈자라 불리는 사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의 마을에 부처님께서 머물며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도반에게도 권선한다면 복덕이 생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고을의 관리들은 모두에게 공양을 올릴 스님의 명부를 작성하는 등 보시공양을 실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극빈자도 단 한명의 스님에게 내일 아침 공양을 올릴 것을 약속하고, 돈을 구하기 위해 하루 동안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평소 생계에 전전긍긍하며 일할 때와는 다르게, 덕 높으신 스님께 공양을 올리고 그 공덕으로 복을 짓을 생각에 온통 환희심으로 가득했겠지요.

다음 날 관리를 찾아가 스님의 처소를 묻자, 모든 스님에게 백성들이 이미 공양을 올렸다고 말합니다.

실망하는 극빈자에게 단 한 분이 아직 공양을 받지 않았다며, 부처님에게 안내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하기에 극빈자는 정성껏 지은 공양물을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부처님은 공양을 받은 후 극빈자에게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대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속히 이뤄지기를, 보름달이 가득 차듯이 그대의 바람이 가득 차기를, 그대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속이 이뤄지기를, 소원을 빌면 이뤄지는 마니보주처럼, 그대의 소원이 속히 이뤄지기를, 소원성취하소서.” 훗날 극빈자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보시의 공덕으로 나라의 고위급 관직은 물론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 설화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복덕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공양을 올릴 뿐 도반에게 권하지 않으면 재복은 있지만 인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남에게는 시주하라고 권하면서 정작 자신은 시주하지 않는 사람은 인복은 있지만 재복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이도 저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복도 재복도 따를 수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불자들은 부처님 전에 작은 공양을 올리면서 너무 많은 소원을 바라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봅시다.

행불선원에서는 부처님 전에 작은 저금통을 놓고 ‘부처님 용돈 쓰세요’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번 생에서 많은 보시를 해야 다음 생에 부자로 살 수 있고, 그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라며 소원을 구걸하는 마음을 연습하면 다음 생에 극빈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인’과 부처님의 가피 ‘연’이 만나면 소원 성취 우리는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인연은 원인을 의미하는 말로, 인(因)은 결과를 낳지 위한 내적인 직접 원인을 뜻하고,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 간접적인 원인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자를 합쳐 원인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부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써 생겨나고 인연으로써 소멸하는 연기의 이법을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아함경)에서는 인간이 미망(迷妄)과 고통의 존재임을 12인연으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어떠한 발원을 세웠을 때 인은 나의 노력, 연은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이 두 가지가 만나야 발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인이 충실해도 연이 부실하면 과가 부실하고, 연이 충실해도 인이 부실하면 과가 부실합니다.

인과 연이 모두 충실해야 과가 충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연법입니다.

부처되게 해 달라며 소원 구걸하는 연습하면 다음 생에 극빈자가 되고 만다.

신과 우리는 불법(佛法) 배우는 도반, 굳이 신에게 종노릇 할 필요 있나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할 때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부처님께 기도만 한다면 이뤄지지 않듯,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로 건강하게 지켜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연이 조화를 이루면 뜻이 이뤄집니다.

그만큼 바른 신행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를 할 때는 그 속에 발원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구걸형 기도이고, “~하겠습니다.”는 발원형 기도입니다.

그렇게 바르게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흔히 부처님은 ‘법신불’이라고 해, 마음 깊이 참나 자리에 계셔서 색깔이나 모습, 음성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신불만 있다면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못해, 법당 앞에 풀의 키가 한자나 자랄 만큼 발길이 뚝 끊기겠지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나투신 부처님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바로 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님이 그러한데요.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들은 ‘보신불’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심안이 열렸거나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꿈속에서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나, 텅빈 마음자리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신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신이 나를 대신해서 밥을 먹어줄 수도, 잠을 잘 수도, 법문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일 뿐이며, 그래서 지금의 내 모습과 미래는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정불변의 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 법당에 앉아 저와 마주하고 있는 행위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면 여러분의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불교는 절대 숙명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 뿐 아니라 신들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신과 우리는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도반이니, 굳이 신에게 종노릇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교훈적입니다.

그런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으로 이웃종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비교해봅시다.

이웃종교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신만이 아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은 인과설에 따른 당연한 이치입니다.

즉, 고정된 나는 없기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나를 만들 것인가는 내가 만들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共) 사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메시지입니다.

이때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내가 선택해 스스로 채워나가는, 내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아설의 핵심 이론입니다.

성불(成佛)은 행불(行佛)로부터 바로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십시오.

우리의 삶은 한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더 멋지고 아름답게 변하기에 우리의 삶은 판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