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옹스님─부처 마음자리

■부처 마음자리/서옹대선사■ 사람은 심적 구조로 볼 때 가장 밑바닥에 감각과 욕망이 있어서 그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물론 감각과 욕망이 없어서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중심적임과 동시에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한량없이 불안에 허덕이게 됩니다.

또한 욕망에 끄달리면 자기의 올바른 정신이 없게 되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 참자유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질서도 없고, 폭력이 생기게 됩니다.

흔히 현대를 이성적으로 살고 이성을 각성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개방된 욕망으로 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산다고 하면 당연히 질서를 지키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과학문명을 창조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인간이 구경적으로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착하다,악하다, 참이다?거짓이다, 이러한 대립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결국에는 절대절망과 불안 그리고 절대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감각 위에 이성이 있고 이성을 개발해서 살지만 그것만으로는 원만하게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 그 바탕에는 부처님 마음, 종교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참으로 무아의 경지, 절대의 경지, 영원의 생명체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서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도와서 어디든지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근본바탕의 이 부처마음, 이것을 개발해서 살면 훌륭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문명을 이룩한 동기에는 대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자, 대자연의 법칙을 연구해서 우리 인간이 이용하자, 이러한 못된 생각이 밑에 깔려 있습니다.

대자연을 정복하자는 것은 하나의 욕망입니다.

물론 과학문명 자체를 개발하는 데 있어서는 이성으로 개발하지만 그 동기에는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과학문명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학문명으로만 본다면 우리의 욕망이 과학문명과 이성을 이용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만한 인격자라고 하면 부처 마음자리의 작용으로 감각과 욕망이 작용되어야 원만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과학문명을 보면 거꾸로 욕망이 과학기술과 이성을 이용합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급급한 요즘의 우리 생활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사실 아닙니까.

오늘날 이성의 전당이라 하는 대학교가 진실한 이성을 개발하는 전당이 아니라 욕망을 달성하는 기술적 이성을 습득하고 배우는 학교로 전락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졸업하면 얼마나 돈을 벌 수가 있느냐, 얼마나 취직을 잘 할 수가 있느냐, 얼마나 권력을 잡을 수가 있느냐, 이러한 목적으로 학교에 다닙니다.

학교에서 많은 학문을 배우지만 결국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학문이고 기술적 이성이지, 그 이성이 인간을 지배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처럼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주축으로 삼는 시대를 산업시대, 즉 산업사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산업사회란 모든 것을 경제적으로만 개발하고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경제적이라는 것은 욕망입니다.

욕망으로만 살려고 하니까 서로를 해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인심이 험악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결국 파멸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올바른 삶이라면 부처 마음자리가 이성을 지배하고 감각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처 마음자리의 작용으로 원만한 인격을 가꾸는 한편 부처 마음자리의 바탕에서 과학문명을 새로 창조하여 그 부처 마음자리에서 자기도 부처님인 동시에 일체 인류를 부처님으로 존경해서 봉사하는 그러한 행복한 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류가 타락하고 위기를 면하지 못하는 현실을 구제하는 사명이야말로 불법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생사를 해탈하려고 출가하셔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역관(逆觀)하고 순관(順觀)해서 생사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깨달으시고 그 무명을 타파하고 초월해서 도를 깨치셨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무명(無明), 행(行), 식(識) 이와 같은 순서로 깨달으셨으니, 의식과 현행의식이 나타나기 이전에 무명, 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식이 나타나기 이전입니다.

무명은 요즘 말로 하면 잠재의식인데 행도 그 잠재한 능력, 잠재한 형성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잠재의식은 의식이 나타나기 이전이니까 무의식입니다.

요새 심리학에서는 더 들어가서 개인의 잠재의식이 아닌 여러 사람의 잠재의식을 집합적 무의식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무명이라는 것은 모든 중생의 공통되는 잠재의식, 요즘 심리학 용어로 말하면 집합적 무의식입니다.

무명이 집합적 무의식이라면 부처님이 무명을 타파해서 초월한 자리를 일컬어 집합적 무의식을 타파하고 초월한 데서 깨달은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사선(祖師禪) 하면 조사선도 똑같습니다.

가령 간화선(看話禪)을 말하면 처음의 화두에 의심 한 덩이가 되고, 이 의심이 간단없이 지속해서 무의식이 되고, 의식이 끊어진 자리에서 뒤집어져 가지고서 견성한다고 합니다.

조사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을 통과하고 타파해서 견성한다는 것과 부처님이 무명을 타파했다는 것은 똑같은 말입니다.

이 조사(祖師)스님 말씀으로 불법을 보아야 그게 옳은 것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그 자리, 자기 참모습 자리에서 봐야지 이걸 의식적으로 풀이하면 옳은 불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과 조사스님의 말씀과 행동을 겉으로 보면 우리의 감각세계나 이성세계와 똑같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조사스님의 말과 행동은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그 본래면목 자리, 인간의 참모습 자리에서 참으로 걸림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지, 보통사람이 감각과 이성적인 분별심으로 하는 행동과 말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조주(趙州)스님 회상에서 대중공양이 베풀어졌을 때 그 방에 여러 훌륭한 스님이 쭉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노파가 들어와서 여러 스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대중스님들은 엄마가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주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큰애기는 오역불효(五逆不孝)다.

부모도 죽이고 부처도 죽이고 나한도 죽인 그러한 험악한 오역죄 불효야.”

조주스님과 같이 훌륭한 스님을 보고 오역불효라고 하는 것은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큰 법문입니다.

그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차원 높은 인간의 참모습에서 그 자리를 그대로 표현한 훌륭한 말이지, 이것을 보통사람의 차원에서 비판하면 잘못입니다.

조주선사가 눈을 부릅뜨고 보니 노파는 나가 버렸습니다.

이처럼 선(禪)이라는 것은 설명하면 틀려 버리고, 지해(知解)로 풀이해도 틀려 버리니, 그러면 어떠한 경지냐, 여기에 말을 또 하나 붙여 보겠습니다.

종사(宗師)가 중생을 연민히 여겨 검은 것과 흰 것을 밝혔으니 북녘땅 황하수가 아주 혼탁하도다.

宗師憫物明緇素 北地黃河徹底渾 그러면 또한 필경에 어떠한 것이냐.

납자의 생애가 별것이 아니요 한 자 물이 능히 만장의 물결을 일으키도다.

衲僧活計無多子 尺水能興萬丈波 이것은 어떠한 소식인가?

월하스님─ 복은 스스로 지은만큼 받는다

복은 스스로 지은만큼 받는다

-월하스님-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무엇이든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만약 형상이 없다고 한다면 어둡고 밝은 것이 어떤 인연과 거래가 있다고 할 것이냐 궁금하기 한량 없습니다.

모든 일이 사람의 마음으로 인해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고 장애가 생기기도 하고 애로가 쉽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기가 지은 만큼 복을 받기도 하고 잘못하면 벌은 받는 것이지 다른 누가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주듯 복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받는 것도 누가 다른 사람이 떠밀어 주듯 받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을 잘못하면 스스로 벌이 되는 것이고 행동을 잘하고 마음을 잘 쓰면 복이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행동하면 복이 되고 어떻게 행동하면 죄가 된다는 말씀만 하셨어요.

하고 안하고의 행동의지는 각자 자기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소시수대공덕(小施受大功德)”이란 조그마한 것을 베풀어 큰 공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아함경이란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모친의 유래를 말한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친께서 생전에 궁전에 계실 적에 궁전에는 사방 백보를 걸어갈 수 있는 곳을 전부 금은과 유리로 깔았습니다.

땅이 금빛도 나고 은빛도 나고 칠보로 장엄이 돼 휘황찬란했어요.

거기에다 백미의 음식이라든지 모든 것이 자기 앞에 진열되어 있어요.

그 당시에 아난다존자라고 하는 분이 있었어요.

아난다는 부처님 사촌입니다.

부처님 모친에게는 조카가 되지요.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었어요.

숙모께선 어떻게 그렇게 찬란한 복을 수용하게 됐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친이 전생에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당시 쌀 한되를 길가 돌부처님에게 올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공덕으로 복을 수용하게 된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또 앞으로 5백생은 전륜왕위를 지어 전륜왕이 되고 5백생은 제석신의 몸을 받고 5백생은 대국 왕후의 자리를 받고 있습니다.

모든 쾌락을 다 받은 후에는 그 몸에서 천불을 출생시킨다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청정광여래가 된다고 합니다.

이러니 그 공덕, 즉 쌀 한되의 공덕이 이와 같은 복을 받고 마지막에 가서는 청정광여래가 된다 하셨습니다.

그런걸 보더라도 조그마하지만 진실한 공덕을 쌓은 사람은 쌀 한되를 부처님께 올린 공덕처럼 크나큰 복덕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첫째 살아가는데 아무런 재해가 없어야겠고 복도 많아야 되겠지요.

명도 길어야 하는데 중간에 아무런 재앙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중생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없고 재해라는 것에도 구애를 안받고 모두 초월했지요.

그렇지만 중생들은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걸 필요로 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먹어야 하고 입어야 되고 편해야 되며 욕심이 있으니 뭐든지 가져야 힘이 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유모어가 많은 사람이 건강하다고 합니다.

유머러스한 사람은 남을 잘 웃기고 남에게 이맛살 찡그리는 일은 안하거든요.

자기 마음이 쾌활한 사람이라야 남을 웃기지 자기 마음이 찌그러진 사람은 남을 잘 웃기지 못하거든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오래 사는 것이나 오래 못사는 것이나 다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안좋고 쾌활한 느낌이 없이 살다보면 항상 이마가 찡그려지고 얼굴에 주름살도 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신과 모든 힘이 위축이 되고 결국 죽게 마련입니다.

중생계는 재앙 등 장애가 있습니다.

불교에 조예가 깊고 많은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재앙을 요령있게 피하고 잘 이해하며 잘 해석하는데 그렇지 못한 분들은 막혀서 자기가 그런 것을 피할 수 있는 소견이 안생기고 혼미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잘 피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밝아야 하는데 지혜가 밝으면 그런 묘리가 금방 생긴다고 합니다.

이래서 그야말로 자기가 죽지도 살지도 않은 그런 경계까지 밝혀서 잘 실행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생사를 초월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죽는 것에도 걸리지 않고 사는 것에도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육체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지 육체를 떠난 입장에서는 생사의 구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입장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어떻게 죽고 사는 것이 없다하고 그것을 초월하느냐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사람은 육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마음이라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죽는 것이고 육체가 사는 것이지 마음 자체는 죽으나 살으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산다고 해서 별스럽고 더해지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해서 감해지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육체라는 것은 지수화풍 4대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연이 다하면 각각 흩어진다고 하지요.

사람이 죽으면 뼈는 흙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흙으로 간다고 합니다.

또 모든 액체 소변이나 피, 고름은 물에서 왔기 때문에 물로 가고 또 체온은 자연물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로 돌아갑니다.

또 움직이는 동작은 풍에 속하는데 그것 역시 풍으로 돌아가고 네가지가 각각 돌아가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허망하다고 하는 겁니다.

육체라는 것은 여러가지가 섞여 형성되었기에 그것을 부정하게 보는 겁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육체처럼 깨끗한 것이 없고 육체처럼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몸 밖에는 아무 물건도 없다해서 몸이 제일이라고 위하는 것만 알고 몸이 조금이라도 상할까봐 애를 쓰고 약이란 약은 다 먹고 몸에 도움된다고 하면 무엇이든 다 먹죠.

그러나 육체란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죽게 마련입니다.

이래서 그런 것을 무상하다 합니다.

이면의 자기 마음자리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음 얘기를 예로 확실한 증거를 여러분께 얘기하고자 합니다.

옛날 등운봉스님이 계셨는데 그 절은 크고 대중도 많았어요.

밥짓는 공양주가 있었는데 솥에다 불을 지피다 잘못해 옷에 불이 붙어 타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 생각하기를 내가 공양주를 안했으면 타죽는 일이 없었을텐데 공양주를 해서 타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공양주를 하라고 권한 사람이 등운봉스님이라 그 스님을 원망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일단 죽으면 염라대왕에게 한번 거친답니다.

염라대왕은 그 사람이 생전에 복짓는 일을 많이 했나 복을 감하는 일을 많이 했나 살피는 것이죠.

복짓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곳으로 안내해 사람으로 또 태어나게 한다든지 아니면 도인으로 태어나게 한다든지 하는 조사나 재판을 염라대왕이 다 합니다.

그래서 죽는 거야 어떻게 죽든 염라대왕 앞에까지 갔는데 염라대왕이 너는 생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불에 타 죽은데 대해 기분 나쁘게 여기고 있던 터에 마음 먹은 대로 얘길 했어요.

“등운봉스님이 공양주를 억지로 시켜 밥을 짓다 옷에 불이 붙어 죽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고 그 스님이 원망스럽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스님을 잡아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해 등운봉스님을 데리고 오라고 저승사자를 보냈어요.

절에 가면 가람신이 있는데 가람신은 도량전체를 살피는 일을 합니다.

가람신이 저승사자에게 어딜 가느냐고 물었어요.

등운봉스님을 데리러 왔다고 했더니 찾아보라고 하면서 내가 12년을 여기 있었어도 등운봉이란 사람은 본적이 없다고 그래요.

그래서 사자들이 찾아보니 아무도 없어 그냥 돌아가서 염라대왕에게 보고 하자 타서 죽은 이가 발을 구르면서 거기 가면 있는데 못찾고 왔다고 하더란 거예요.

염라대왕이 그럼 네가 가서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가보니 스님이 마당에 있었어요.

가서 붙잡고 염라대왕에게 가자고 했더니 무슨 이유로 나를 오라 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자 스님은 한마디만 하고 가자고 했어요.

사람이고 짐승이고 자기의 성품과 마음자리는 본래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라고 하는 것은 불로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물로도 능히 빠뜨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네가 죽었으면 아무 것도 없을텐데 내게 와서 이러는 거 보면 죽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말에 납득되어 자기가 생각해봐도 죽으면 아무 것도 없을텐데 이 스님을 원망하는 것이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깨닫고 나니까 스님을 원망한 것이 부질없고 거기서 깨닫고 나니까 염라대왕에게 다시 갈 필요도 없는 것이고 사람이 자기가 자기 마음을 깨달으면 만사 해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여러분들은 중생의 몸을 가지고 세상살이도 해야 하고 자녀도 키워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자기 몸도 가꿔야 하고 좋은 것도 사서 발라야겠고 좋은 옷도 입어야겠고 이것이 중생의 본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오래사는 것도 아니고 육체에 아무리 치중해봐야 성불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이치를 몰라 자꾸 거기에 치중하고 그 야단치다 인연이 다해 죽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다 소용없는 것이죠.

죽는 마당에서 육체에 치중해봐야 허망하고 허사라는 걸 깊이 깨닫고 나면 알뜰히 먹고 입으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연히 그런 생각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굶지 않을 정도로 먹으면 그만이고 적당히 입으면 그만이지 좋은것 갖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생활이 가벼워지고 그런 생각이 나기 전에는 부족감이 느껴지지만 그런 것은 사람을 용렬하게 만들고 오래사는 것도 아니니 불교 믿는 분들은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말은 쉽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차츰차츰 익히고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은 당신 생각보다도 남을 먼저 생각해 남을 위해 노력하지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이기주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부처님소리 들을 수도 없고 보살소리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 당장 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하려고 노력해 봐야합니다.

노력하다 보면 실천에 옮겨지는 거에요.

우리가 희망과 목적을 뚜렷하게 정하고 노력하면 된다는 거지요.

육체만 죽고 사는 것이지 자기 마음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믿으면 불교 믿는 보람이 거기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해서 중생이에요.

중생들은 부모에 걸리고 형제간에 걸리고 부자지간에 걸립니다.

다겁다생으로 내려와 부모도 많고 형제도 많고 내외간도 많은데 하필 금세간에 부모와 내외와 자녀들에게 끌려 그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게 허둥대는 것을 차원높은 경지에서 보면 그야말로 가소롭고 우습게 생각되지요.

세상을 살아 나가되 차츰차츰 그런데 뜻을 두고 목적을 향해 나가는 것이 불교 믿는 근본 이유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지까지 간 이들은 두루 광명이 어디고 다 비치기 때문에 어두운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사람이 다 자기의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걸 닦아서 빛을 내면 일월보다도 밝아요.

하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등을 사용할 줄 모르면서 해뜨기를 기다리고 달뜨기를 기다리면서 어떤 일을 하고 길을 찾으려 합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본성을 바로 보기 위한 수행을 열심히 해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