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32) 진여의 법계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眞如法界(진여법계)엔 無他無自(무타무자)라

진여의 법계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바로 깨친 자리인 진여의 법계, 즉 일심법계에는 일체의 망념이 사라지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성의 광명이 있을 뿐으로 상대적 차별은 없어져 주관과 객관의 대응이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자기 관념도 없으며 남을 의식하는 생각도 없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즉 일체를 초월하여 현상계의 차별을 벗어났으므로 일심법계의 절대 경지에 들어가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절대무(絶對無)의 세계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이며, 불변(不變)의 체(體)인 그곳에서 수연(隨緣)의 작용이 일어나 만법이 생성하는 것이다.

要急相應(요급상응)인대 唯言不二(유언불이)니

재빨리 상응하려 한다면 오직 둘 아님을 말할 뿐이니

아무 것도 없는 진여의 법계에 합치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로 회통되는 둘이 아닌 이치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세계를 초월해야 절대세계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앞의 구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도 없고 남도 없다’는 말이 곧 현상의 차별을 초월한 둘이 아닌 경계이다.

상대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둘을 근본 본질에서 보아 하나라고 할 때, 이 하나와 둘은 또한 상대적인 차별을 이루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마저 끊어져야 하는데, 이 경우 실은 둘을 떠난 하나도 따로 없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중도中道마저 없다는 것이다. 논리란 자칫 함정이 있는데, 논리의 함정에 빠지면 도(道)와는 어긋나게 된다.

제목 : [12.16] 2016 대학입시, 맞춤형 학과중심 입시 설명회

맞춤형 학과중심 입시 설명회
포기란 없다, 맞춤형 학과 설명회

2016학년도 대학입시 수험생들과 학부모님들의 대학진학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대학을 선택할 때 점수와 간판이 아니라 학생의 적성과 학과의 미래비전, 취업률 등에 초점을 맞추라는 취지의 신개념 대학입시설명회가 12월 16일 오후 6시부터 9시 반까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內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립니다.

‘포기란 없다, 맞춤형학과설명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이번 설명회는 대학진학을 앞둔 수험생 뿐 아니라 예비수험생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가 주최하는 이번 설명회에서는 전국의 유망학과 12개학과 교수들이 직접 나와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학과의 비전을 설명합니다. 또 공교육 베테랑 진학담당교사인  안연근(잠실여고) 교사를 비롯한 여러 입시 전문 선생님들이 2016학년도 정시모집에서 꼭 알아야 할 사항과 소개하는 학과들의 진학 정보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날 소개하는 학과들은 취업률이 70~80%에 달하는 학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일시: 2015년 12월 16일(수) 오후 6시~9시 30분
□ 장소: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內 전통문화예술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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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조계사

신심명(31) 훤히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라

虛明自照(허명자조)하야 不勞心力(불로심력)이니라

훤히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라.

‘훤히 밝다’는 허명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밝은 빛이 저절로 비춰지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양변의 부정을 의미하고, ‘명(明)’이란 양변을 모두 부정한 쌍차(雙遮)를 살려낸 양변 동시긍정(同時肯定)의 쌍조(雙照)를 뜻한다. ‘허’가 ‘명’을 비추고 ‘명’이 ‘허’를 비추어 부정과 긍정이 동시(同時)가 되는 차조동시(遮照同時)를 말한다.

그런데 이는 진여자성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가사의한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억지로 마음을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도(道)’는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유위심(有爲心)의 사유분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다에 파도가 일고 있는 자연은 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았을 때에는 파도가 없었으므로 고요한 수면이 바다의 본래 모습이며, 그것은 거울과 같은 작용을 나타내는 바이다.

非思量處(비사량처)라 識情難測(식정난측)이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곳이라 의식과 감정으로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도(道)는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지식이나 과학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꿈을 꾸는 몽경(夢境)에서 깨어 있는 세계로 나오려면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과 같다. 의식과 감정이 물든 세계는 항상 생각이 움직이는데, 이는 곧 사량처이며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물줄기처럼 흘러간다.

이른바 추념(抽念)과 세념(細念)이 일어나 계속될 때 훤히 밝게 비추는 도의 자리는 이지러져 버리는 것으로, 물결이 출렁이는 물 위에 하늘의 달이 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행의 지위에서 볼 때 세념(細念)이 끊어진 경지는 등각(等覺)의 지위를 넘어선 묘각(妙覺)의 자리에 이르러야 되는데, 거기가 바로 구경각(究竟覺)이며, 그때 진여법계(眞如法界)가 나타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