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거스님─없앨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없앨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혜거스님

– 아무리 얻을려고 한들 얻어지는 것은 본래 없다.

공부는 얻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없앨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탐진치를 없앨려고 공부한다.

탐진치 없는 것이 성불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그 순간 업을 안 짓게 된다.

자기 허물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 때 참선이 잘 되는 것이다.

자기 허물이 보이지 않고 남의 허물이 보이면 그건 참선이 아니다.

자기를 보는 사람은 밖을 안 보게 되어 있다.

밖의 사람은 전부 다 훌륭하고 위대하게 보일 뿐이다.

자기가 너무 부족하고 너무 모자라게 보일 뿐이다.

항상 상대를 보고 상대방에서 내가 하지 못한 것, 내가 알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하고 있는 것을 빨리 느껴야 된다.

아! 저 사람은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저렇게 하는 구나! 이러면 전부가 다 스승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항상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지어서 업보가 있는 것이다.

누가 끌고 가서 업보가 있는 것 아니다.

업보 조심해야 한다.

철저하게 하자.

업장에 지지 말자.

몸뚱이 병은 병 찾고 약 쓰면 낫는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병이다.

아뇩다라는 밖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고 다만 마음에 내 것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앞생각이 잠깐 일어나면 뒷생각이 바로 알아차릴 것이니 알았으면 이미 머물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이 이렇게 중요하다.

확실하게 알면 없어져 버린다.

깨달음이 정법이다.

우리는 전부 다 좋은 일 생기기만 원한다.

그런데 나쁜 일 생기는 것 절대 기분 나빠하지 마라.

일 하다가 장애 없으면 다른 장애 생긴다.

장애, 절대 나쁜 것 아니다.

장애는 우리에게 극복의 대상이지 굴복은 하지 말아라.

모퉁이가 큰 것은 아예 모퉁이가 없다.

큰 눈을 가질수록 점점 차별이 없어진다.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차별이 없다.

이 세상을 이끄는 사람은 이와 같은 안목을 빨리 갖추어야 한다.

혜거스님─불자의 실천

***불자의 실천/

혜거스님

*** 정녕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인 각(覺)과 아는 것인 지(知)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명확합니다.

알고는 있으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알 지(知)’요, 아는 것이 실천으로 바로 이어지면 ‘깨달을 각(覺)’ 입니다.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라야 아는것이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아 향상하고, 멋진 삶 을 영위해야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는가? 불교를 깨달 음의 종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 는가? 이것을 연구해 들어가야 한 차원 높아지는 공부가 되고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연구해 들어가지 않으면 불교를 백년 믿어도 소용이 없습 니다.

경전에는 아는 것과 깨달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지만 행하지 못하면 마음이 없는 것과 같고 마음이 있고 행도 있으면 모든 부처님과 같도다.

유심불행동무심(有心不行同無心) 유심유행동제불(有心有行同諸佛) 마음은 있고 행이 없으면 마음을 먹지 않은 무지한이와 다를 바가 없으며, 마음이 있고 실천행도 뒤따르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연구하고 실천할 것인가? 나는 불자들에게 세 가지 사항을 많이 강조 합니다.

첫째, 1인 1경(經)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을 잘 실천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한 경전을 꾸준히 지니고 읽는 것을 의무 적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한 경전을 꾸준히 읽으면 자연히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고 행복해집니다.

그럼 어떤 경전부터 읽을 것인가? 만약 망설임이 있 다면 금강경부터 읽으십시오.

금강경은 반야(般若), 곧 올바른 소견과 지혜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일도 금강경 한 구절 아는 것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금강경은 중생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제일’ 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고통이 무엇이며 왜 생기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불만이 있으니 고통이요, 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으니 고통이요, 미운 사람의 그림자만 봐도 기분이 나빠지니 이 또한 고통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 할 것 없이 고통 없는 곳이 없는데, 그 근원을 살펴보면 집착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고통 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끊어야 합니다.

성문, 연각, 보살은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같이 듣지만 해석은 달리 합니다.

듣고 배우는 사람인 성문(聲聞)은, ‘집착이 모든 고통 의 원인이구나.

고통을 가지고 살지 말자.

집착을 끊 어버리고 벗어나자’ 하고는 현실의 모든 것에 대해 ‘버리고 떠나고 끊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버리고 끊게 되면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고통이 파생 됩니다.

인연을 잘 비추어보는 연각(緣覺)은, ‘고통은 집착으로 부터 나온다’는 말을 듣고, ‘집착도 영원하지가 않다.

오늘은 꽃에 집착하고 내일은 나무에 집착하고, 오늘 은 명예를 좇고 내일은 돈을 좇고 있으니…’라면서 성문보다는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무엇이 안 된다고 하여 몸부림치지 않게 되므로,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보살(菩薩)은, 근본자리를 깨달 아서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 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고통 자체가 없습니다.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성문, 연각, 보살은 이와 같이 차이가 납니다.

실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없애야 하는데, 집착을 없애는 방법이 바로 반야(般若) 입니다.

그럼 반야를 성취하는 방법을 제시한 경전은 무엇인가? 바로 금강경입니다.

반야의 근본자리에서 보면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설한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을 꾸 준히 수지독송 하다 보면 보살의 무집착(無執着)을 저절로 체득하게 됩니다.

물론 다른 경전을 읽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금강경부터 공부하고 매일 수지독송 하되, 궁금한 것이 있거나 더 향상하고자 할 때는 얼마든지 다른 경전을 공부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둘째,1일 1선(善)의 실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베풉시다.

이는 하루에 착한 일 한 가지씩을 꼭 하자는 것입 니다.

아무리 조그마한 선행일지라도 하루에 한 가지는 꼭 하는 버릇을 들이십시오.

눈에 띄고 마 음이 흐뭇할 정도의 선행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남을 칭찬해주는 말 한 마디, 기어 다니는 벌레를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좋은 선행입니다.

셋째, 날마다 자기 반조(返照)를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은 밖으로만 향 하여 사물에 끄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끄달림 속에서 갖가지 번뇌망상을 일으켜 미혹되고 고통 스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반조하면 어떻게 됩 니까? 자연 번뇌가 잦아들게 되고, ‘나’는 ‘참된 나’ 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이것이야말로 수행의 기본입니다.

우리가 매일 한 경전을 꼭 수지독송하고, 한 가지 선행을 쉬지 않고 실천하면서, 날마다 자신을 반조 하게 되면 크게 향상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머릿속에 딱 지니고 살면, 우리의 업은 억 겁의 업이라 할지라도 얼음 녹듯이 녹아 없 어지고, 어떠한 길을 걸어가든 조금도 장애가 싱기지 않는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월간 [법공양] 8월호에서-

혜거스님─보살로 사는 길

보살로 사는 길

-혜거스님-

보살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즘같이 혼탁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바로 보살일 것입니다.

보살이란 보살마하살의 준말입니다.

마하살(摩訶薩)이란 마하살타의 준말로서 대유정(大有情)·대사(大士)라 번역하며 보살의 미칭(美稱)입니다.

마하(摩訶)는 대(大)의 의미입니다.

보살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대원(大願)과 대행(大行)을 가진 사람이므로 마하살이라 하며,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중생 가운데서 맨 윗자리에 있으므로 대(大)자를 더하여 대사·대유정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중생 가운데서 제일 윗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보살, 그것도 대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위로는 도를 구하면서도 아래로는 다른 이를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대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도를 구하는 데에만 전력투구하면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외면하고 무관심해도 대보살이라 할 수 없고, 또 다른 이를 위해서 봉사하고 노력해도 자신을 위해 마음을 닦고 도를 구하지 않아 온갖 일에 탐진치(貪瞋痴)를 일으키고, 남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생색을 낸다면 이 또한 대보살이라 할 수 없습니다.

대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안과 밖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완벽히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보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즉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무주(無住), 무소주(無所住) 즉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자취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어떤 행위를 하고도 집착이 없고 자취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布施)란 단나(檀那)바라밀이라고도 하며 물질로나 법으로나 자기 소유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에는 자비심으로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물건을 주는 재시(財施)와 어리석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깨치게 하는 법시(法施), 그리고 스스로 계를 지켜 남을 침해하지 않고 다른 이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주는 무외시(無外施)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보시는 공덕을 바라고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 주어도 준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시한다는 마음[施者]도 없고 베푸는 물건[施物]도 보지 않으며 받는 사람[受者]도 분별하지 않아야 참보시인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인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보살이 피안(彼岸)에 이르는 방편인 만행(萬行)도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이 중 보시가 으뜸이 됩니다.

나머지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가 그 다음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시 한 가지가 보살의 온갖 수행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마주치는 대상들이 색·성·향·미·촉·법 육진(六塵)인데, 이들은 항상 우리들의 본심을 빼앗고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도적들입니다.

그러므로 보시할 때도 이들 여섯 가지에 머물지 말야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으로 보면 본 것에 집착하고, 소리를 들으면 들은 것에 집착하고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에 집착하고 맛을 보면 그 맛에 집착하고, 접촉하면 그 감촉에 집착하고, 어떤 일을 생각하면 그 생각한 것에 집착하는 등 마주치는 것마다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은 우리를 미혹하게 만들며 한 치도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장애하여 자기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고통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데 조금도 상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이익되게 하는 이런 보살이 많이 나와야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각자가 보살이 되기 위해 열심히 정진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정진력으로 세상을 이익되게 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