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공덕(念佛功德) 이야기◆ 월하 대종사 우리가 염불을 할 때 남따라 절에와서 몇번 부처님을 부르다가 절밖을 나서면 잊어버리고 해서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얻기 어렵다. 염불이란 틈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꾸 해야만 된다. 오동지 섣달 긴긴밤에 천번을 염(念)하고 만번을 염하고 하늘이 밝은지 어두운지도 모르고 자꾸만 염불해야 한다. 오로지 한소리 한마음으로 참구하면 삼매(三昧)를 얻는다. 옛날에 고춘삼이라는 두 내외가 살았는데 평소 염불을… 월하스님─염불공덕(念佛功德) 이야기 계속 읽기
[카테고리:] 월하스님법문
월하스님─ 복은 스스로 지은만큼 받는다
복은 스스로 지은만큼 받는다
-월하스님-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무엇이든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만약 형상이 없다고 한다면 어둡고 밝은 것이 어떤 인연과 거래가 있다고 할 것이냐 궁금하기 한량 없습니다.
모든 일이 사람의 마음으로 인해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고 장애가 생기기도 하고 애로가 쉽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기가 지은 만큼 복을 받기도 하고 잘못하면 벌은 받는 것이지 다른 누가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주듯 복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받는 것도 누가 다른 사람이 떠밀어 주듯 받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을 잘못하면 스스로 벌이 되는 것이고 행동을 잘하고 마음을 잘 쓰면 복이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행동하면 복이 되고 어떻게 행동하면 죄가 된다는 말씀만 하셨어요.
하고 안하고의 행동의지는 각자 자기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소시수대공덕(小施受大功德)”이란 조그마한 것을 베풀어 큰 공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아함경이란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모친의 유래를 말한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친께서 생전에 궁전에 계실 적에 궁전에는 사방 백보를 걸어갈 수 있는 곳을 전부 금은과 유리로 깔았습니다.
땅이 금빛도 나고 은빛도 나고 칠보로 장엄이 돼 휘황찬란했어요.
거기에다 백미의 음식이라든지 모든 것이 자기 앞에 진열되어 있어요.
그 당시에 아난다존자라고 하는 분이 있었어요.
아난다는 부처님 사촌입니다.
부처님 모친에게는 조카가 되지요.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었어요.
숙모께선 어떻게 그렇게 찬란한 복을 수용하게 됐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친이 전생에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당시 쌀 한되를 길가 돌부처님에게 올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공덕으로 복을 수용하게 된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또 앞으로 5백생은 전륜왕위를 지어 전륜왕이 되고 5백생은 제석신의 몸을 받고 5백생은 대국 왕후의 자리를 받고 있습니다.
모든 쾌락을 다 받은 후에는 그 몸에서 천불을 출생시킨다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청정광여래가 된다고 합니다.
이러니 그 공덕, 즉 쌀 한되의 공덕이 이와 같은 복을 받고 마지막에 가서는 청정광여래가 된다 하셨습니다.
그런걸 보더라도 조그마하지만 진실한 공덕을 쌓은 사람은 쌀 한되를 부처님께 올린 공덕처럼 크나큰 복덕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첫째 살아가는데 아무런 재해가 없어야겠고 복도 많아야 되겠지요.
명도 길어야 하는데 중간에 아무런 재앙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중생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없고 재해라는 것에도 구애를 안받고 모두 초월했지요.
그렇지만 중생들은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걸 필요로 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먹어야 하고 입어야 되고 편해야 되며 욕심이 있으니 뭐든지 가져야 힘이 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유모어가 많은 사람이 건강하다고 합니다.
유머러스한 사람은 남을 잘 웃기고 남에게 이맛살 찡그리는 일은 안하거든요.
자기 마음이 쾌활한 사람이라야 남을 웃기지 자기 마음이 찌그러진 사람은 남을 잘 웃기지 못하거든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오래 사는 것이나 오래 못사는 것이나 다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안좋고 쾌활한 느낌이 없이 살다보면 항상 이마가 찡그려지고 얼굴에 주름살도 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신과 모든 힘이 위축이 되고 결국 죽게 마련입니다.
중생계는 재앙 등 장애가 있습니다.
불교에 조예가 깊고 많은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재앙을 요령있게 피하고 잘 이해하며 잘 해석하는데 그렇지 못한 분들은 막혀서 자기가 그런 것을 피할 수 있는 소견이 안생기고 혼미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잘 피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밝아야 하는데 지혜가 밝으면 그런 묘리가 금방 생긴다고 합니다.
이래서 그야말로 자기가 죽지도 살지도 않은 그런 경계까지 밝혀서 잘 실행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생사를 초월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죽는 것에도 걸리지 않고 사는 것에도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육체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지 육체를 떠난 입장에서는 생사의 구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입장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어떻게 죽고 사는 것이 없다하고 그것을 초월하느냐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사람은 육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마음이라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죽는 것이고 육체가 사는 것이지 마음 자체는 죽으나 살으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산다고 해서 별스럽고 더해지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해서 감해지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육체라는 것은 지수화풍 4대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연이 다하면 각각 흩어진다고 하지요.
사람이 죽으면 뼈는 흙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흙으로 간다고 합니다.
또 모든 액체 소변이나 피, 고름은 물에서 왔기 때문에 물로 가고 또 체온은 자연물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로 돌아갑니다.
또 움직이는 동작은 풍에 속하는데 그것 역시 풍으로 돌아가고 네가지가 각각 돌아가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허망하다고 하는 겁니다.
육체라는 것은 여러가지가 섞여 형성되었기에 그것을 부정하게 보는 겁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육체처럼 깨끗한 것이 없고 육체처럼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몸 밖에는 아무 물건도 없다해서 몸이 제일이라고 위하는 것만 알고 몸이 조금이라도 상할까봐 애를 쓰고 약이란 약은 다 먹고 몸에 도움된다고 하면 무엇이든 다 먹죠.
그러나 육체란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죽게 마련입니다.
이래서 그런 것을 무상하다 합니다.
이면의 자기 마음자리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음 얘기를 예로 확실한 증거를 여러분께 얘기하고자 합니다.
옛날 등운봉스님이 계셨는데 그 절은 크고 대중도 많았어요.
밥짓는 공양주가 있었는데 솥에다 불을 지피다 잘못해 옷에 불이 붙어 타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 생각하기를 내가 공양주를 안했으면 타죽는 일이 없었을텐데 공양주를 해서 타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공양주를 하라고 권한 사람이 등운봉스님이라 그 스님을 원망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일단 죽으면 염라대왕에게 한번 거친답니다.
염라대왕은 그 사람이 생전에 복짓는 일을 많이 했나 복을 감하는 일을 많이 했나 살피는 것이죠.
복짓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곳으로 안내해 사람으로 또 태어나게 한다든지 아니면 도인으로 태어나게 한다든지 하는 조사나 재판을 염라대왕이 다 합니다.
그래서 죽는 거야 어떻게 죽든 염라대왕 앞에까지 갔는데 염라대왕이 너는 생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불에 타 죽은데 대해 기분 나쁘게 여기고 있던 터에 마음 먹은 대로 얘길 했어요.
“등운봉스님이 공양주를 억지로 시켜 밥을 짓다 옷에 불이 붙어 죽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고 그 스님이 원망스럽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스님을 잡아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해 등운봉스님을 데리고 오라고 저승사자를 보냈어요.
절에 가면 가람신이 있는데 가람신은 도량전체를 살피는 일을 합니다.
가람신이 저승사자에게 어딜 가느냐고 물었어요.
등운봉스님을 데리러 왔다고 했더니 찾아보라고 하면서 내가 12년을 여기 있었어도 등운봉이란 사람은 본적이 없다고 그래요.
그래서 사자들이 찾아보니 아무도 없어 그냥 돌아가서 염라대왕에게 보고 하자 타서 죽은 이가 발을 구르면서 거기 가면 있는데 못찾고 왔다고 하더란 거예요.
염라대왕이 그럼 네가 가서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가보니 스님이 마당에 있었어요.
가서 붙잡고 염라대왕에게 가자고 했더니 무슨 이유로 나를 오라 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자 스님은 한마디만 하고 가자고 했어요.
사람이고 짐승이고 자기의 성품과 마음자리는 본래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라고 하는 것은 불로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물로도 능히 빠뜨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네가 죽었으면 아무 것도 없을텐데 내게 와서 이러는 거 보면 죽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말에 납득되어 자기가 생각해봐도 죽으면 아무 것도 없을텐데 이 스님을 원망하는 것이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깨닫고 나니까 스님을 원망한 것이 부질없고 거기서 깨닫고 나니까 염라대왕에게 다시 갈 필요도 없는 것이고 사람이 자기가 자기 마음을 깨달으면 만사 해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여러분들은 중생의 몸을 가지고 세상살이도 해야 하고 자녀도 키워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자기 몸도 가꿔야 하고 좋은 것도 사서 발라야겠고 좋은 옷도 입어야겠고 이것이 중생의 본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오래사는 것도 아니고 육체에 아무리 치중해봐야 성불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이치를 몰라 자꾸 거기에 치중하고 그 야단치다 인연이 다해 죽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다 소용없는 것이죠.
죽는 마당에서 육체에 치중해봐야 허망하고 허사라는 걸 깊이 깨닫고 나면 알뜰히 먹고 입으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연히 그런 생각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굶지 않을 정도로 먹으면 그만이고 적당히 입으면 그만이지 좋은것 갖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생활이 가벼워지고 그런 생각이 나기 전에는 부족감이 느껴지지만 그런 것은 사람을 용렬하게 만들고 오래사는 것도 아니니 불교 믿는 분들은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말은 쉽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차츰차츰 익히고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은 당신 생각보다도 남을 먼저 생각해 남을 위해 노력하지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이기주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부처님소리 들을 수도 없고 보살소리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 당장 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하려고 노력해 봐야합니다.
노력하다 보면 실천에 옮겨지는 거에요.
우리가 희망과 목적을 뚜렷하게 정하고 노력하면 된다는 거지요.
육체만 죽고 사는 것이지 자기 마음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믿으면 불교 믿는 보람이 거기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해서 중생이에요.
중생들은 부모에 걸리고 형제간에 걸리고 부자지간에 걸립니다.
다겁다생으로 내려와 부모도 많고 형제도 많고 내외간도 많은데 하필 금세간에 부모와 내외와 자녀들에게 끌려 그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게 허둥대는 것을 차원높은 경지에서 보면 그야말로 가소롭고 우습게 생각되지요.
세상을 살아 나가되 차츰차츰 그런데 뜻을 두고 목적을 향해 나가는 것이 불교 믿는 근본 이유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지까지 간 이들은 두루 광명이 어디고 다 비치기 때문에 어두운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사람이 다 자기의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걸 닦아서 빛을 내면 일월보다도 밝아요.
하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등을 사용할 줄 모르면서 해뜨기를 기다리고 달뜨기를 기다리면서 어떤 일을 하고 길을 찾으려 합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본성을 바로 보기 위한 수행을 열심히 해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