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無心)이 부처다

무심(無心)이 부처다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 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는데 이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하고 무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이란 망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十地等覺)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 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이 왔다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無意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第六識)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第八識: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시, 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보살까지는 의식 속에 살고 8지 이상, 10지, 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 무의식세계든지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 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아 있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佛性)이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끼인 먼지를 다 닦아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 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추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이것을 적조(寂照) 혹은 적광(寂光)이라고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 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무심은 바꾸어 말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생이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고, 불멸이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말이니, 즉 불생이란 적(寂)이고 불멸이란 조(照)입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이 무심입니다.

무심을 경(經)에서는 정혜(定慧)라고도 합니다. 정(定)이란 일체 망상이 모두 없어진 것을 말하고, 혜(慧)라는 것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이 무심을 완전히 성취하면 또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성불(成佛)인 동시에 열반인 것입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상 대열반이여!

두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는도다.

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추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고요함[寂]만 있고 비춤[照]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起信論)}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離一切苦 得究竟樂]” 이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實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明鏡)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定慧等持)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모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 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 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 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천 가지 만 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예전의 고인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볼 것 같으면 유교, 불교, 도교, 유불선 3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먼지 앉은 그 명경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싹 닦아 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불?선이 꼭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불?선 3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 어떤 철학 할 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그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란 것은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하고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事理),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알려면 망상을 벗어나서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邪知邪見]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正知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떠야 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 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木石)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다 닦아 버릴 것 같으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걷히어 해가 드러나면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대지혜 광명이 항상 온 우주를 비추는 것을 불멸(不滅)이라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떤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 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날 만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접 밥을 떠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 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땅 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려고.

우리가 ‘성불! 성불!’ 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無心)을 실증(實證)합시다.

내가 부처가 된 때

내가 부처가 된 때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내온 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지로다.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億阿僧祗

이 구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 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한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것은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해서 성불하여 열반하신 지 지금부터 2천 5백여 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자기가 성불한 지가 무량백천만억 아승지 이전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에 있어서 부처님이 2천 5백년 전에 출현하여 성불하신 것은 방편이고 실지로는 한량없는 무수한 아승지겁 이전에 벌써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불교에 대한 기본자세, 근본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보통 물으면 ‘성불이다’, 즉 부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례껏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실제 내용은 중생이 본래부처(本來是佛)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성불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 일체 생명, 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 무정(有情 無情) 전체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본래 자기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는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시방법계가 불국토(佛國土) 아닌 곳, 정토(淨土) 아닌 나라가 없다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인 줄 확실히 알고 온 시방법계가 본래 불국토며, 정토인 줄 알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불(佛),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 아닌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심지어 저 허공까지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처소시방법계 전체가 모두 다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즉 정토이며 불국토인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부처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광명을 못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주법계 전체가 광명인 동시에 대낮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근본 병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눈을 떴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광명이고,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부처이고, 전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눈감고 캄캄한 암흑세계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광명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더라. 본래부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盤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

이 구절은 앞의 게송에 계속되는 구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멸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항상 법문을 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계시는 곳은 전부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백 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법계에 안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주불멸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 미래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이렇게 되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華藏刹海), 무진법계, 극락정토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부처님은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개인 한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삼라만상 일체가 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항상 무진법문을 설하고 있으며 무량불사(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백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는 바위가 항상 무진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즉 생물은 으례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세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가 전체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 모두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이렇게도 혹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토(佛土)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지만 눈감은 사람을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알간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해도 된다’, ‘눈뜰 필요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 광명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꼭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 불멸인데 이 불생불멸의 원리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어 있다고.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만 눈감았다. 눈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끼인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때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뜰래야 안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부처지 위에 들어간다, 한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밝아질래야 안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 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보일 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도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척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 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래에 와서 순치황제(順治皇帝)같은 분은, 만주에 나와서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건설한 분입니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티벳, 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負木)이 되었습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대영웅 순치황제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나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가? (我本西方一衲子綠何流落帝王家)’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천자의 보위(寶位)를 헌신짝 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25사변 때 서울대학에서 교수하던 문박사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 형제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당신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다.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보편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씌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보살의 육도만행(六度萬行) 6바라밀의 처음이 무엇인고 하니 베푸는 것이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야!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리려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하는 이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불공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절하고 복비는 것이 불공이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는 것이 불공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동안이라도 도와줄 것 같으면 그것이 자기 옆에 갖다 놓는 것보다는 여러 억천만배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이라고.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마음의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영원한 큰 살림살이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는 것이 부처님에게 갖다 놓은 것보다 비유할 수 없는 만큼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교주되는 사람이 ‘나카야마 미키’라는 여자 분입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도 굉장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 딴에는 마음의 눈을 떠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살림살이는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살림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 마누라 였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당신 스승이야! 내가 깨쳤어! 내가 하나님이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미쳤나? 왜 이러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우리 살림살이를 전부 다 팝시다. 이것 다 해봐야 얼마나 되나요. 모두 다 남에게 나누어줍시다. 그러면 결국에는 참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돈벌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줘버렸습니다. 이제 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 먹으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도우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돈벌이는 크게 한 것입니다. 우선의 조그만 살림살이를 나눠주고서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를 한번 해 봐야겠다’이렇게 작정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 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재산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준다면!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설사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생활방침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해 욕심부리는 것은 결국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꾸 노력하면, 참으로 남을 돕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마음의 눈을 떠서 청천백일(靑天白日)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을 많이 할 것 없이 한가지라도 남을 도우는 생활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가 앞으로 바른 길로 서려면 승려도 신도도 모두 생활방향이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느냐 하면 남을 돕는 데로 완전히 돌려져야 합니다. 승려가 예전같이 산중에 앉아서 됫쌀이나, 돈푼이나 가지고 와서 불공해 달라고 하면 그걸 놓고 똑딱거리면서 복 주라고 빌고 하는 그런 생활을 그대로 계속하다가는 불교는 앞으로 영원히 없어지고 맙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도 또한 그렇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자식이 머리만 아파도 쌀되나 가지고 절에 가서 ‘아이고, 부처님, 우리 자식 얼른 낫게 해주십시오’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참된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승려도, 신도도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발전이 없습니다. 산중에 갇혀서 결국에는 아주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불교 승단에는 승려 전문대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도 논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자식 공부 시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승려를 자꾸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포교하며 또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나중에는 법당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들을 교육시키자’하는 것이 내 근본생각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종단적인 차원에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이 억천만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화두를 배워서 마음속으로 화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화두를 하고, 행동은 남을 도우는 일을 꾸준히 할 것 같으면 어느 날엔가는 마음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인간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無量大佛事)를 미래겁이 다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춤뿐이겠습니까? 큰 잔치가 벌어질 텐데 그렇게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구도자의 질문

구도자의 질문

1. 생명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일체 만법이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어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거래(去來)가 없고, 생명(生命)도 거래(去來)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엄(華嚴)에서도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이요,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이라 하였고 법화(法華)에서도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상자적멸상(尙自寂滅相)”이라 하였는데, 이 적멸상(寂滅相)은 생멸(生滅)이 끊어진 불변상(不變相)을 말함입니다.

이 불생불멸을 진여(眞如), 법계(法界), 연기(緣起), 실상(實相), 법성(法性), 유식(唯識), 유심(唯心) 등 천명만호(千名萬號)로 이름하나 그 내용은 다 동일합니다. 이는 우주의 근본원리이며 불타(佛陀)의 대각 자체(大覺 自體)이어서 일체 불법(一切佛法)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난해하여 불타의 혜안(慧眼)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치 못하였으며, 이 불생불멸은 자고로 불교의 전용어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현대과학에서도 원자물리학으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여 불교의 이론에 접근하여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3천 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였고, 과학은 3천 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하여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相通)합니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습니다. 다만 불타의 혜안(慧眼)이 탁월함에 감탄할 뿐입니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常住法界)에는 증감과 거래(去來)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입니다. 이 무진연기상의 일체 생명은 성상일여(性相一如)이며 물심불이(物心不二)여서 유정무정(有情無情)의 구별이 없고, 생명은 유정무정의 총칭입니다.

그러므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어야만 생명의 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개개(個個) 생명(生命) 전체가 절대여서 생멸거래가 없습니다. 무정(無情) 생명론은 너무 비약적인 것 같으나 유정(有情)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요, 무정(無情)도 항상 활동하고 있으니, 예를 들면, 무정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소립자(素粒子)들은 스핀(Spin)을 가져 항상 자동적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들도 간단없이 운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백억의 살아 있는 석가가 취하여

훈풍 끝에 춤추는도다.

百億活釋迦

醉舞春風端

2. 불교의 이상은 인간의 범주에 머물러야 합니까, 아니면 초월해야 합니까?

불교에서 볼 때에는 생멸 즉 진여이며, 따라서 현실이 절대이므로 번뇌 즉 보리(菩提)이며(육조단경), 중생 즉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여 일체를 구족(具足)한 절대적 존재이니 다시 초월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타가 출현한 것은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전하는 것뿐이요, 중생을 제불로 변성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진금(眞金)을 어떤 사람이 착각하여 황토로 오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금을 아무리 오인하여 황토라 호칭하여 사용하여도 진금은 변함 없이 진금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진금을 다시 구할 것이 아니요, 오인된 착각 즉 망견(妄見)만 시정하면 진금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일시적 착각으로 본래 진불(眞佛)을 중생으로 가칭하여 중생으로 행동하여도 진불은 변함 없으므로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하라. 즉 진(眞)을 구하지 말고 오직 망견(妄見)만 제거하면 됩니다.(신심명)

이렇게 중생이 진불(眞佛)이며, 사바(娑婆)가 즉 정토(淨土)이며, 현실(現實)이 즉 절대(絶對)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편협한 망견을 고집하여 겨울의 얼음을 모르는 여름의 하루살이가 되지 말고 본래시불(本來是佛)의 진(眞)소식을 개오(開悟)하여야 합니다.

비로자나불의 이마 위 사람이

십자가두에 섰도다.

毘盧頂上人

十字街頭立

3. 진정한 뜻에 있어 인간회복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고 일체를 구족(具足)한 절대적 존재이니 이것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합니다. 이 본래시불을 중생으로 착각하여 중생이라 가칭하며 중생으로 행동하고 있으니, 이 망견을 버리고 본래불(本來佛)인 인간면목을 확인하는 것이 인간회복입니다.

진금(眞金)을 황토(黃土)로 착각하였으나 활연히 각성하여 진금(眞金)임을 확인하면 다시는 더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또한 면경(面鏡)과도 같습니다. 본래 청정한 면경이 일시적으로 때가 끼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나 그때만 닦아 버리면 청정한 그 면경이 그대로 드러나서 일체를 비출 것이니 다른 면경을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면목, 즉 심경(心鏡)을 덮은 때와 먼지를 상세하게 규명하여 그 진애(塵埃)가 티끌만치도 없도록 철저히 제거함을 인간회복의 본령(本領)으로 삼고 있습니다.

심경을 덮고 있는 이 진애인 망견을 추중( 重)과 미세(微細)로 양분하여 추중( 重)은 제6식, 즉 현재의식이며, 미세는 제8식, 즉 무의식(無意識)입니다. 이것만 완전히 제거하면 자연 통명(洞明)하여 진불인 본래면목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면경을 부수고 오너라.

푸른 하늘도 또한 몽둥이 맞아야 하는도다.

打破鏡來

靑天也須喫棒

4. 종교 안에서 인간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종교를 일반적으로 유한(有限)에서 무한(無限)으로, 상대(相對)에서 절대(絶對)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유한이 즉 무한이며 상대가 절대임을 주장합니다.

일반 종교는 현실 외에 절대를 따로 세워서 자기가 생존하는 현실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에 들어감을 목표로 삼습니다. 불교에서는 현실이 즉 절대이어서 인간이 절대무한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절대세계를 다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를 ‘상대’로 착각하는 망견(妄見)만 버리면 삼라만상이 전체가 절대이며 일체가 본래 스스로 해탈하니 불교의 진리는 인간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가령, 태양이 하늘 높이 밝게 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눈을 감고서는 “어둡다, 어둡다”고 소리치면 눈뜬 사람이 볼 때에는 참으로 우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어둡다 한탄하지 말고 눈만 뜨면 자기가 본래 대광명(大光明)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다만 눈을 가린 망견만 버리면 자연히 눈을 뜨고 광명이 본래 충만해 있었음을 볼 것이니, 눈만 뜨면 인간이 본래 절대 광명 속의 대해탈인(大解脫人)임을 알 것입니다.

부처도 또한 찾아볼 수 없거늘

어떤 것을 중생이라 부르는가.

佛也見不得

云何名衆生

5. 불확실성의 이 시대에 사는 현대인의 방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될 것입니까?

광명(光明)이 적조(寂照)하여 하사세계(河沙世界)에 편만(遍滿)하니 일체가 각각 자기 위치에서 태평(太平)을 구가하거늘, 무엇이 ‘불확실’하며 어떻게 ‘방황’하는지 ‘불확실’, ‘방황’ 등의 언구(言句)는 진정한 불교사전에는 없습니다. 다만 눈을 바로 뜨고 좌우를 두루 보십시오.

광활한 대로(大路)는 우주보다 더 넓고, 혁혁한 광명은 수천 개 태양이 병조( 照)하는 것과 같아서 설사 천지가 붕괴하더라도 당황할 게 없습니다.

생사(生死)다 해탈이다 함은 백일하(白日下)의 잠꼬대요, 불타니 보살이니 부름은 명경상의 먼지이니, 우리는 본래의 광명(光明)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수양버들은 실 끝마다 푸르고

복숭아꽃은 조각조각 붉도다.

楊柳系系綠

桃花片片紅

6. 욕망과 물질은 인간에게 있어 무엇입니까?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욕망과 물질은 무가(無價)의 진보(珍寶)입니다.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나 국가 민족만을 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인류라는 협소한 한계를 넘어서서 일체 생명을 위한 욕망과 물질이야말로 참다운 진보(珍寶)입니다.

자기 개인을 위한 사리사욕은 물론 해독(害毒)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아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일체를 위해서만 사는 삶은 제불(諸佛)의 본원(本願)이며 보살의 대도(大道)입니다.

만 섬 쌀을 배에 가득 싣고 마음대로 쏟으니

도리어 쌀 한 톨로 인하여 독이 뱀을 삼켰도다.

萬斛盈舟信手拏

劫因一粒甕呑蛇

7. 불교의 사회구제는 가능합니까?

‘구제’라는 어구는 불교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이 절대적 존재로서 일체의 생명이 불타 아님이 없으므로, 불교에 입문(入門)하는 첫 조건이 일체 중생을 부모와 같이 존경하고 사장(師長)과 같이 섬기며 부처님과 같이 시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奉仕)’가 있을 뿐 구제와 구원은 없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불공(佛供)임을 항상 역설하지만, 이 ‘남’이라 하는 것은 절대자를 지칭함이며 절대자는 불(佛)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즉 불공입니다. 보통 남을 돕는다면 부자가 가난한 이를 돕는 태도인데, 이것은 참으로 남을 도울 줄을 모릅니다. 참다운 도움은 병든 부모를 자식이 모시듯, 배고픈 스승께 음식을 드리듯, 떨어진 옷을 입으신 부처님께 옷을 올리듯 하여 모든 ‘남’을 항상 받들어 모시는 태도만이 진정한 남을 돕는 것입니다.

구제라 함은 이와 반대로 약하고 가난한 상대를 불쌍한 생각으로 돕게 되는 바, 이는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이니 불교에서는 구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니체는 얼마나 값싼 동정을 그다지도 싫어했던가. 니체여!) 어디를 가나 배고픈 부처님, 옷 없는 부처님, 병든 부처님 등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 무수한 부처님들을 효자가 부모 모시듯이, 신도가 부처님 받드는 성심으로 섬기며 돕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니 ‘봉사’가 있을 뿐 구제는 없습니다.

사자는 여우소리를 내지 않도다.

獅子不作野干鳴

8. 한국 불교는 1980년대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불교에는 만고에 일관된 진리가 있을 뿐, 시대적이거나 지역적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시하처(何時何處)를 막론하고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만사를 행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일체 생명 즉 중생이 ‘본래시불(本來是佛)’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생명의 절대를 널리 전하며, 모든 사심을 떠나 아무것도 구함이 없이 일체 중생불에서 신명을 다해 봉사하는 것뿐입니다.

천겁을 지나도 과거 아니요

만세에 걸쳐 항상 지금이로다.

歷千劫而不古

 萬世而長今

9. 수행하는 승려들에게 주고 싶은 스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지구가 광대하지만 무변한 허공의 먼 곳에서 바라보면 찾아볼 수도 없는 미소한 물체입니다. 허공이 그렇게도 광활하지만 진여법계에 비하면 대해(大海)의 일적(一滴)에 불과하므로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은 여해일구발(如海一 發)이라, 즉 허공이 대각(大覺) 속에서 생기(生起)함은 대해(大海)의 물거품이 하나 일어남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체 생명의 본체인 진여법성(眞如法性)의 공용(功用)은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이어서 미진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언설하여도 법성공용(法性功用)의 일호(一毫)도 설(說)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불가사의한 무가진보(無價珍寶)를 일체 생명이 구유(具有)하고 있으니, 허망한 몽환 속의 구구한 명예와 이양(利養)은 일체 버리고 이 무진장의 보고(寶庫)를 활짝 열어서 일체를 이익케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탐타일립미(貪他一粒米)하여 실각만겁량(失却萬劫糧)이라, 즉 한 톨의 쌀알을 탐하여 만겁의 양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순치(順治)황제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창건한 영웅입니다마는 발심출가(發心出家)할 때에, 자기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일개 납자(衲子)였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萬乘天子)로 타락하였는고[我本西方一衲子 緣何流落帝王家],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보위(寶位)를 헌신짝같이 차버리는 용단이야말로 수도인(修道人)의 참다운 심정(心情)입니다.

그러하니 우리 수행자들은 오직 대각(大覺)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체를 희생합시다.

달밝은 깊은 산에 소쩍새 울음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