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 그 마음을 놓아라

그 마음을 놓아라 법상스님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일 터입니다.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법상스님─ 그 마음을 놓아라 계속 읽기

법상스님─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법상스님-

이제 막 연초록의 잎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연초록의 새순들이 나무위로 내려앉으며, 노오란 생강나무와 분홍빛 진달래가 외롭던 산에 생기로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순간 파도처럼 산야를 스쳐지나가는 거샌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법당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부딪치는 낙엽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봄꽃을 느낀다.

산은, 나무는, 꽃들은, 또 지난 해 땅에 떨어졌던 썩어가는 낙엽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안에 생기로운 도반처럼 다가와 노크를 하곤 한다.

바람의 소리, 낙엽 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관조(觀照)의 빛을 일깨우는 우주의 경책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이 불어 와 대지를 스치고, 낙엽과 나무를 스치며, 내 뺨을 스치는 그 상서로운 느낌, 소리,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깃든다.

아직 바람은 차다.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창 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대지를 적신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찬 바람을 느끼며 조근조근 낙엽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내 몸은 하늘하늘 미묘한 설렘과 알 수 없는 적요, 가득함, 맑음, 밝음, 편안함, 차분함 같은 것들 속에 내맡겨져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의 찰나로 돌아 와 보라.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며, 도반이며, 신이고 붓다 그 자체이다.

한번 내 존재를 가지고 실험 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든 좋다.

바로 그 상황, 지금 이 순간의 그 상황이 바로 신을 만나고, 붓다를 친견하며, 내 안의 깊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때다.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잠시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복잡한 생각들이 있거나, 대인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거나, 회사 일로 인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언제든 잠시 한 생각 돌이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면 우린 무엇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직접 평화로운 정원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절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참선을 시작해야만 고요와 평온과 삼매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때만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 존재의 본래 속성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러나 그 속성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과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책 ‘고요함의 지혜’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언제나 ‘이 순간’이 아니던가? 이 한 순간, 즉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삶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직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는 나는 어디에 있든 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편안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짐보따리를 지고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편안하다.

그것이 회사 사무실이 될 수도 있고, 꽉 막힌 도시의 차 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쁜 업무 중에 잠시 만나게 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순간, 회사를 살리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 동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되는, ‘지금 이 순간’을 100% 존재하며 살아나가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리 편한 순간일지라도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으면 그 마음은 평화가 아닌 번뇌요 복잡스런 순간이지만, 아무리 정신 없고, 큰 문제가 생겨난 순간일지라도 그 순간 마음이 ‘지금 여기’에 머물러 깨어있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직접 그 자리에서 본연의 지혜를 보게 될 수 있다.

책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의 그 어떤 현실에도 경의를 표하라.

부처님께 예경하고, 신께 나아가 기도하듯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께, 붓다에게 감사와 찬탄과 찬양과 경의를 표하라.

‘지금 이 순간’의 신을, 부처를 우리는 언제나 ‘지금’ 만날 수 있다.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지금을 사는 것이 삶의 구심점이 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은 부처의 방식대로, 신의 방식대로, 지혜의 방식대로 여유롭고도 평화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그 진리의 열쇠가 바로 ‘지금 여기’다.

톨레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것이다.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에 마음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삶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삶에 대한 회피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한가지는 오직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아니며, 목표 달성도 아니고, 노후 준비도 아니며, 진급도, 합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온전히 느끼고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일체 모든 상황과 인연과 환경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관하는 것,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선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최고의 혁신적인 수행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과 다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하라.

내 앞의 삶과 투쟁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번뇌, 고민, 상황들일지라도 그것과 씨름하고 이겨내려 애쓰고 다투려 들지 말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라.

신경쓰지 말라.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은 것이냐고 탓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 자연스러운 내면의 번뇌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붙이며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내 다툼의 행이다.

내 안에서 혹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묵연히 지켜보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내 마음을 포개지 말라.

안팎의 경계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판단치 말라.

그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따라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매 순간 순간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매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과 정진,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인생이 경이로움을, 존재가 신비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신의 나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순간 나도 세상도 우주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깨어있음의 빛을 지금 이 순간에 비추라.

그 빛이 지금을 비추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언젠가 있을 성도(成道)의 때란 없다.

계속해서 톨레는 말한다.

“불자들은 늘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최근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 밑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는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를 준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생명의 지혜와 힘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별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요, 상의상관성이다.

이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사물도 없고, 아무 이유없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건도 없다.

우주적인 전체의 진리성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혹은 사건으로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 우주적인 진리성, 불성, 법신, 진리의 당체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며 번뇌들도 법신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이며,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며, 환경, 상황, 문제들 또한 불성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도, 사건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가 다 법신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의 드러남이며, 부처의 시현이고, 신의 현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상의상관적인 연기법의 진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며, 우주적인 전체성 속에서 법신불의 향기가 화신으로 나투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관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행이요 수행이다.

‘지금 이 순간’이 부처이며 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전체이다.

끊임없이 놓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요 참된 삶의 길이다.

법상스님─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법상스님-

‘나’는 없습니다(無我).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가 없는 이유는 ‘나’ 홀로 만들어진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며, ‘나’ 스스로 배워 익힌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몸도 내가 아니며, 마음, 생각 또한 내가 아닙니다.

이 몸이란 부모님을 의지해 태어난 것이며, 마음, 생각들이란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살아오며 부딪쳐온 이 모든 환경들로부터 배워 익혀 온 것들에 불과합니다.

어느 하나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결코 찾을 길이 없습니다.

몸이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또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육신의 지수화풍 또한 이 우주의 지수화풍을 잠시 인연에 맞게 빌어다 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 쌀이 있습니다.

분명 쌀과 나는 별개입니다.

그러나 물(수)과 열(화)의 인연을 지어 주고나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밥이 됩니다.

밥은 밥이지만 우리가 밥을 먹고나면 밥은 더이상 밥이 아닌 ‘나’가 되는 것입니다.

살이 되고 뼈가 되어 내 몸이 되는 것입니다.

물도 물이지만 마시고 나면 ‘나’가 되고, 과일도 과일이지만 먹고나면 ‘나’ ‘내몸’이 되며, 공기도 공기지만 들이마시고 나면 ‘나’의 호흡이 됩니다.

본래부터 나였던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오면 그것을 보고 ‘나’라고 이름지어 집착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시간이 흐른 뒤까지 지금 이 모습, 이 세포 그대로의 나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나’는 변화합니다.

어떤 살저름을 보고 나라고 이름지을 수 없습니다.

손가락이 잘렸다면 그 잘린 손가락을 보고 나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몸에서는 한치라도 ‘나’를 찾아볼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 생각, 가치관들이 ‘나’일까요? 내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생각이며, 가치관이며 선악관들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내’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이거나, 배운 말이거나, 살아오며 환경에 의해 익혀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가정환경, 학교, 사회, 역사, 책, 사람들…

이 모든 주변 일체의 환경에 의해 내 마음, 내 생각이 만들어 진 것일 뿐입니다.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생각을 꺼내어 보십시오.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말을 꺼내어 보고,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일으켜 보십시오.

입을 여는 순간 우리는 익혀온 말을 하고 익혀온 생각, 생각의 조각을 짜맞추는데 머리를 굴리게 됩니다.

익혀온 관습, 생각, 가치관, 선악관,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머릿 속을 온통 어지럽혀 놓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자라고 익혀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나름대로의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주워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선악이며, 성격이나 몸매의 좋고 나쁨, 유식과 무식에서, 능력의 많고 적음, 근기의 우열…

이 모든 것들은 본래 있지도 않습니다.

본래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온 천지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린 ‘나’라고 하는 통 속에 주워담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나름대로 주워담고는 좋으니 나쁘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행복하니 괴로우니, 크니 작으니, 똑똑하니 어리석으니…

숯한 분별을 일으킵니다.

그 분별 속에 우리네 중생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 놈만 놓으면, 나만 없어지면 그만 온갖 분별이 딱 끊어져 온통 환히 밝아지는 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제 스스로 ‘만큼의 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 놓고는 밖을 탓하고 삽니다.

그러니 본래 ‘내 생각’ ‘내 마음’ 또한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격이 나인가요? 성격 또한 환경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해갈 것입니다.

지금의 성격이 ‘나’인 것 또한 아닙니다.

과연 무엇을 보고 ‘나’라고 이름 붙이시겠습니까? 어디에서 ‘나’를 찾으실건가요? ‘나’는 없습니다.

‘나’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 수레가 있습니다.

바퀴가 수레인가요? 바퀴살이 수레인가요? 손잡이가 수레입니까? 수레는 어디에도 없지만 인연따라 잠시 수레라는 이름이 붙은 것 뿐입니다.

그렇기에 수레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런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것에 숯한 분별을 지어 형상화 하고, 상(相)을 지어 ‘나’라고 이름 붙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거짓 생명력을 지닙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봅니다.

제 스스로 ‘거짓 나’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거짓나의 인연놀음에 울고 웃고를 숯하게 반복하며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어디에 ‘나’를 붙이시겠습니까? 무엇을 ‘나’라고 하시겠습니까? ‘나’가 본래 없을진데 무엇을 괴로워하며 무엇을 행복해 하시겠습니까? ‘나’ 없는 자리에 그 어떤 깨달음을 붙일 것입니까? ‘나 없음’이면 그대로 깨달음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