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은 큰 바다와 같다 흔히 불법을 큰 바다에 비유해서 불법대해(佛法大海)라는 표현을 씁니다. 불법을 바다에 비유하는 것은 바다가 넓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다는 ‘불숙사시(不宿死屍)’라고 해서 죽은 시체를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사람이 빠져 시체가 되든, 더러운 오물을 집어던지든, 기름을 흘려보내든 간에 그 더러운 것이 바다에 떨어져도 그것을 걸러내어 청정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는 자체적으로 정화시키는 힘을 가졌으며, 정화하지 못하는 찌꺼기는 결국 바닷가로 밀어내는 속성이 있습니다. 불법을 바다에 비유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때문에 온갖 부정적이고 그늘지고 어두운 것들로 덮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법이란 바닷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그러한 삶의 찌꺼기들이 전부 정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법 속에 들어와서 기도를 하거나 불공을 드리거나 참선 공부를 하는 일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좋지 않은 온갖 부정적인 불행과 아픔들을 정화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저 푸른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청정한 삶으로 완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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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해설- 두번째
[2].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범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無量劫) 가운데 마음을 등져서 오직 모든 법을 관조하되, 법에 얽매여서 자유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관하여 깨달으면 법을 가히 얻을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색법(色法= 質量의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니 일어난 마음을 돌이켜 관하면 그 일어난 곳이 없다. 실로 가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항상 색(色= 質量)이 없으면 무엇을 쫓아 있겠는가. 오히려 저 헛된 꿈과도 같음이니 생각도 집착도 하지 않으면 저 법의 자재함을 얻고 내지 일체 법을 가히 얻을 것이 없으며 일체 법에 섭수되지도 아니하고 어느 곳에나 자재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마음을 깨달아도 깨달은 마음이 없고 경계를 요달(了達)하나 요달한 경계가 본래 없어서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 요달하되 가히 요달할 바가 없다. 탄연(坦然)히 거리낌 없으므로 자재(自在)이다. 보(菩)는 요달을 말하는 것이오, 살(薩)은 견(見)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법을 요달하여 보매, 본래 텅 비고 고요하므로 이름하여 보살(菩薩)이라 한다. 鬧會요회마 眼裏聞聲方始知 안이문성시방지 이 모든 것을 알겠는가.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안다. [3].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心般若波羅蜜多時) 밖으로 법을 구하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이 본래 스스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건만 소승(小乘)의 마음으로 망녕되게 말과 글로 구하는 견해를 부수어 주는 것이다. 지혜의 이름을 반야(般若)라 하고, 모든 망상을 쉬면 청정함으로 바라(波羅)라 하고, 보는 견해가 텅 비어 한 몸을 합하여 이룸으로 이름을 밀(蜜)이라 한다. 모든 법을 통달하여 기억하고 생각하여 가짐으로 다(多)라고 한다. 마음을 등지고 법을 구하며 망녕되아 닦아 증득(證得)함을 두어 성문승(聲聞乘)에 떨어지니 이름하여 얕은 반야라 한다. 이제 다시 깊은 반야라 한다. 이제 다시 깊은 반야를 실천함을 열거하여 대승(大乘)으로 앞의 잘못됨을 부순다. 보살(菩薩)이 모든 법을 요달하여 보면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실로 나고 멸함이 없으므로 반야라 한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안과 밖이 뚜렷히 통함으로 바라라 한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으니 마음과 법이 둘이 아니므로 밀이라 한다. 마음 성품이 온갖 법을 꾸렸으므로 닦아 증득함을 빌리지 않는 것을 다(多)라고 한다. 이와 같이 깨닫는 것을 이름하여 대승이라 하나니 이 이름이 행심반야바라밀다(行心般若波羅蜜多)이다. 시(時)는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을 모두 얻을 수 없으므로 시라 한다. [4].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五蘊)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하는 것이다. 정미(精微)로히 밝아서 눈이 항상 경계를 바라보므로 색(色)이라 한다. 모든 법을 탐하여 구하고 수행하여 증득함을 바라므로 수(受)라 한다. 모든 법의 인연에 얽히어 유출(流出)이 쉬지 않으므로 상(想)이라 한다. 청정한 계율울 정묘(精妙)로히 지켜서 만행(萬行)을 수행하는 것을 행(行)이라 한다. 여러 가지를 분별하여 법을 따라 유전(流轉)하는 것을 식(識)이라 한다. 이 다섯 가지 법의 장애를 입어 깨닫지 못하므로 온(蘊)이라 한다. 삼계(三界)에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輪廻)가 멈추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고액(苦厄)이라 한다. 보살(菩薩)이 자기의 마음 근원이 본래 청정한 줄 살펴 요달하니 앞의 다섯 가지의 법이 생긴 곳이 없고 본래 비고 고요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가히 얻을 것이 없으므로 오온(五蘊)은 이 모두 텅 빈 것으로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을 건넜다. 要見本來面孔 요견본래면공마 擧頭靑鶴過山城 거두청학과산성 본래의 모습 비공(鼻孔)을 보려느냐. 머리를 드니 푸른 학이 산성으로 날아가도다.
바른 믿음, 바른 이해, 바른 실천
바른 믿음, 바른 이해, 바른 실천 올바른 신행생활은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실천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요즈음에는 그런 운동의 일환으로 법회도 많이 열리고, 경전 강의와 교양대학 등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법회 가 강의를 통하여 불교를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것은 불자로서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높고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믿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올바로 알지 못했지 때문입니다. 불교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실천을 하기 위한 주춧돌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불교 지식의 함양은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실천의 밑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경전공부를 통하여 올바른 불교 지식을 습득함은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항상 공부하는 불자의 자세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불자들의 신행생활은 좀 막연하고 맹목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순수한 신심이긴 하지만 거기서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좋은 불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좋은 불자란 바로 공부하는 불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공부함으로써 불교를 올바르게 믿을 수 있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 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인생의 밤길은 멀고 험하다. 우리의 신행생활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올바른 진리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히 바로 아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보다 잘 가꾸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계를 하나 샀을 때 그 기계의 조작법을 모른다면 그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보잘것없는 물건이라도 그 조작법을 환히 안다면 거기에는 엄청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제자로서 불교 교리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있다면 더욱 신심이 날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간혹 신도 교육을 하지 않는 종파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신심은 올바로 앎으로써 우러나는 것입니다. 올바로 아는 일은 바람직한 불자의 모습을 형성하는 근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불교의 이상인 상구보리上求菩提이며 자리행自利行의 실현입니다. 올바른 불자란 결국 이 세상에서 모범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올바로 아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일이며, 나아가서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처럼 자비행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혼자 알고 있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전법사傳法師의 역할까지 욕심을 부려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불교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우리가 좀더 신경을 쓰고 공부하여 그런 사람들에게 법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한다면 큰 공덕을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만 내면 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방생이나 기도에 대한 포교는 쉽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는 그 정도의 포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님의 말씀까지 전하는 좀더 적극적인 포교사의 역할도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이타행利他行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최종 목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평화와 행복이 각 가정과 사회에서 넘쳐날 때, 궁극적으로 불국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불교인으로서 이 사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고 보탬이 되는 일이란 다름 아린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자리이타행의 실천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처한 가정에서부터 이웃과 사회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실천함으로써 보다 밝아지고 맑아진다면 그것이 진정한 불국토 건설인 것입니다. ‘행지구비行知俱備는 여거이륜如車二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신행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는 것이 합쳐져 올바른 이해가 밑받침된다면, 마치 수레의 두 바퀴가 균형을 이뤄 굴러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수레가 하나의 바퀴로 굴러가기는 힘이 들지만 두 바퀴가 균형을 이루면 쉽게 굴러갈 수 있습니다. 완전한 신앙인이 되려면 기도하고 불공드리는 그 믿음의 바닥에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