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라고 떳떳하게 말하라
-각묵스님-
세상에는 서로 다른 여러 종교가 있고, 서로 다른 여러 철학이 있고, 서로 다른 여러 계율 규범이나 생활 규범이 있고, 또 서로 다른 여러 관습이 있다.
인터넷이나 미디어나 고도로 발달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영향 하에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다양한 가치체계를 접할 수 밖에 없으며, 이들 가운데 특정한 것을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이나 사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한다.
그러면 이러한 다양한 가치체계를 접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무엇일까.
다양한 가치판단 척도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의 (깔라마 경)(A3:65)이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자기 마을에 와서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가르침을 설하자, 그것을 접하여 혼란스러웠던 깔라마 사람들은 (깔라마 경)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문제를 세존께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 문답을 통해서 어떤 가르침이 나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증장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행해서 ‘나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증장한다면 그 가르침은 따르지 말고, 반대로 해소가 된다면 그런 가르침은 따르라.’는 판단의 기준을 말씀하셨고, 이에 감동한 깔라마 사람들은 부처님의 신도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세존의 가르침은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의 (밧디야 경)(A4:193)에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세존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밧디야는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최고의 “개종시키는 요술”이라고 경탄해마지 않는다.
세존으로부터 판단의 기준을 듣고 크나큰 환희심이 생긴 밧디야는 “세존이시여, 세존의 개종시키는 요술은 축복입니다.
그 개종시키는 요술은 훌륭합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사랑하는 혈육과 친척들이 이처럼 개종한다면 그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감격해마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그의 말을 크게 인정하시면서 만일 모든 존재들이 “해로운 법들을 버리고 유익한 법들을 두루 갖추기 위해서 개종을 한다면” 오랜 세월을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으신다.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는 우리는 스스로 불자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나는 불교 신자’라고 떳떳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름만이 불교 신자일 뿐, 안으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폭력적 성향이 득시글거린다면 어찌 자신을 불자라 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 폭력 없음으로 개종해야 한다.
해로운 심리현상들(不善法)을 버리고 유익한 심리현상들(善法)을 두루 갖추기 위해서 개종해야 한다.
그래야 그가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일 것이다.
새해가 되었다.
새해에는 저 깔라마 사람들처럼, 저 밧디야처럼,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불교로 개종을 했으면 정말 좋겠다.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