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31) 훤히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라

虛明自照(허명자조)하야 不勞心力(불로심력)이니라

훤히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라.

‘훤히 밝다’는 허명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밝은 빛이 저절로 비춰지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양변의 부정을 의미하고, ‘명(明)’이란 양변을 모두 부정한 쌍차(雙遮)를 살려낸 양변 동시긍정(同時肯定)의 쌍조(雙照)를 뜻한다. ‘허’가 ‘명’을 비추고 ‘명’이 ‘허’를 비추어 부정과 긍정이 동시(同時)가 되는 차조동시(遮照同時)를 말한다.

그런데 이는 진여자성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가사의한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억지로 마음을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도(道)’는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유위심(有爲心)의 사유분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다에 파도가 일고 있는 자연은 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았을 때에는 파도가 없었으므로 고요한 수면이 바다의 본래 모습이며, 그것은 거울과 같은 작용을 나타내는 바이다.

非思量處(비사량처)라 識情難測(식정난측)이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곳이라 의식과 감정으로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도(道)는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지식이나 과학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꿈을 꾸는 몽경(夢境)에서 깨어 있는 세계로 나오려면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과 같다. 의식과 감정이 물든 세계는 항상 생각이 움직이는데, 이는 곧 사량처이며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물줄기처럼 흘러간다.

이른바 추념(抽念)과 세념(細念)이 일어나 계속될 때 훤히 밝게 비추는 도의 자리는 이지러져 버리는 것으로, 물결이 출렁이는 물 위에 하늘의 달이 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행의 지위에서 볼 때 세념(細念)이 끊어진 경지는 등각(等覺)의 지위를 넘어선 묘각(妙覺)의 자리에 이르러야 되는데, 거기가 바로 구경각(究竟覺)이며, 그때 진여법계(眞如法界)가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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