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30) 의심이 깨끗이 다 없어지면 바른 믿음이 고르게 곧아진다.

狐疑淨盡(호의정진)하면 正信調直(정신조직)이라

의심이 깨끗이 다 없어지면 바른 믿음이 고르게 곧아진다.

분별과 망상은 마음과 경계가 겨루는 유심(有心)의 상태이며, 이는 머무르는 마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고정시켜 둔다. 그러나 실상에 미혹하여 끊임없는 의심이 일어나 스스로 관념의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이므로 바른 믿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자신이 고정시킨 모든 망견을 버릴 때 마음은 맑아져 무심해지는데, 그때에 바로 바른 믿음이 생겨 도와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도를 깨달은 데서 오는 믿음으로 처음 발심하는 믿음과는 차원이 다르며, 능소(能所)가 끊어진 믿음으로 이는 곧 깨달은 마음인데 무어라 이름을 붙여 부르기가 곤란한 것이지만, 한편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법이 하나로 통일된 경지에서는 일체의 명자상(名字相)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一切不留(일체불유)하야 無可記憶(무가기억)이로다.

아무 것도 머물지 아니해서 기억할 것이 없어졌다.

분별하는 식심(識心)이 쉬어져 주객이 서로 응하지 아니하면 거울이 물건을 비추어 주는 것처럼 무심해진다. 바른 믿음이 곧게 서면 진여자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주체화되거나 객체화될 것이 없어 인식의 대상이 없으므로 기억할 것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나도 없어 너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없다’라는 무(無)가 살아나야 도의 집에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없다’라는 것이 견해를 이루면 도리어 머물게 되고 유有의 경계인 분별의 세계가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중봉은 다음과 같은 송(頌)을 붙였다.

一切不有還有見(일체불유환유견) 아무 것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어 견해가 되고

了無可記尙存知(요무가기상존지) 기억할 게 없다는 게 되려 아는 것을 남기네

故家田地非親倒(고가전지비친도) 옛 고향 밭에 친히 가보지 않으면

畵餠何曾療得飢(화병하증료득기) 그림의 떡으로 어떻게 배고픔을 면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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