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심용심(將心用心)하니 기비대착(豈非大錯)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르침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곧 부처다”는 말을 두고 생각해 볼 때, 본래 번뇌와 망상이 없는 진여자성의 참마음은 그대로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모르고 엉뚱하게도 진여자성을 찾는다고 오히려 분별을 일으켜 애를 쓰면서 참선을 한다거나 경전을 본다거나 하니, 도의 자리에서 볼 때에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이미 부처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처를 찾겠다며 오히려 망상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남대문 안에 살면서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격인 것이다.
중봉(中峰)의 송(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卽佛是心心是佛(즉불시심심시불) 부처가 곧 마음이고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擬乘當處早乖疎(의승당처조괴소) 생각해서 알려하면 벌써 틀린 일
飮光眉向花前展(음광미향화전전) 음광(가섭존자)의 눈썹이 꽃 앞에 펴짐이여
平地無端起範模(평지무단기범모) 평지에서 무단히 본보기를 보였네
미생적란(迷生寂亂)이요 오무호오(悟無好惡)니라.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나니
마음이 미혹하면 중생이요 마음이 깨달으면 부처이다. 미혹할 때에는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겨 마음이 움직이지만, 깨달으면 움직이던 마음이 쉬어져 분별이 없어지므로 무심해진다. 그리고 취하고 버리는 집착의 마음이 없으므로 모든 것이 함이 없는 마음인 무위심(無爲心)에서 이루어진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因地而倒者 因地而起)”는 말이 있다.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이 땅으로 인해서이듯 미혹하고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 인해서이다. 사실 범부와 성인을 갈라놓는 것은 마음이지만 마음 자체에는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즉 땅은 원래 사람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