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見狐疑(소견호의)하야 轉急轉遲(전급전지)로다
좁은 소견으로 의심을 하여 급히 할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도는 무심(無心)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심을 배우는 것이 도에 나아가는 지름길이며, 생각을 앞세우거나 마음을 붙들고 있으면 도에 접근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런가 저런가’ 궁리하면서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생각만 급해질 뿐 도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유명한 조주趙州 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라는 공안(公案)이 있다. ‘놓아 버려라!’는 뜻의 이 공안은 마치 무거운 물건을 손에 들고 있다가 내려놓듯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버려 무심에 돌아가라는 뜻을 갖고 있다.
조주 스님이 곧잘 방하착을 말한다는 소문이 났다. 어느 날 엄양(嚴陽)이 조주 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놓아 버리게”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아 버리라는 것입니까?”
“놓아 버리지 않으려거든 짊어지고 가게”
이 말의 끝에 엄양은 깨달았다고 전한다.
執之失度(집지실도)라 必入邪路(필입사로)요.
집착하면 법도를 잃게 되어 반드시 틀린 길로 들어갈 것이요.
집착이란 마음이 어떤 객관의 대상에 붙어 있는 상태인데, 이에 주객(主客)이 나누어져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법도를 잃어 마음은 본래의 순수하고 참된 모습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미혹에 둘러싸여 잘못된 길로 빠져 들게 된다.
[금강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있다.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 말은, 어디에도 대이지 않는 즉 객관의 경계에 붙들리지 않는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본래 대도(大道)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머무는 데가 없으며, 방편상 언어의 개념으로 표현하는 중도와 공(空)에도 머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