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見精駝(불견정추)어니 寧有偏黨(영유편당)가 허공
정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않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정밀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보기 좋은 것을 말하며, 거칠다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은 보기 싫은 것을 말한다. 이는 곧 객관 경계의 차별에서 일어나는 분별인데, 이 뜻은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나가 공空해진 자리에서 얻은 중도(中道)를 알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도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에 머물면서 걸림 없는 자유자재한 활용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인식의 기준을 세워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중도를 잃으며, 중도를 잃으면 역시 변견에 떨어질 뿐이다.
아무리 삼라만상이 차별되어도 거기에는 좋고 싫거나 아름답고 추한 것은 없다. 또한 산이 높은 것도 아니고 물이 깊은 것도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니기 때문에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 것이다. 동시에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기 때문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말들은 궤변처럼 들리지만 어디에도 고정된 관념의 말뚝을 박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大道體寬(대도체관)하야 無易無難(무이무난)이거늘
대도는 바탕이 넓어서 쉬운 것도 없고 어려운 것도 없거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도(道)이다. 이러한 도의 바탕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우주 전체를 다해도 그 영역을 채울 수 없다. ‘능엄경’에서는 “허공이 대각(大覺) 가운데서 생기는 것은 바다에서 한 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空生大覺中 如海一發).” 하였고, [원각경]에서는 “가없는 허공은 각(覺)에서 나온 것이다(無邊虛空覺所顯發).”고 하였다. 대도가 대각이요 도가 각이다. 대도가 바다라면 허공은 한 거품이라는 비유는 대도의 체(體)를 비유하여 설명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