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불통(一種不通)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이니
(한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양쪽 모두 공덕을 잃으니)
일종은 중도(中道)요, 주객(主客)의 대(對)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자성청정심이라 할 수 있다. 또 실제 수행면에서는 선수행(禪修行)의 실참에서 드는 화두(話頭), 또는 공안(公案)인 무(無)나 시심마(是甚麽 : 이뭣꼬?) 같은 것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통달하면 모든 공덕을 전부 성취하지만, 이것을 통달하지 못하면 어느쪽도 공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견유몰유(遣有沒有)하고 종공배공(從空背空)이니라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있음이란 인연에 의하여 생멸하는 현상계의 사상(事相)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부정하여 버리면 오히려 현상의 사상에 빠지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공(空)은 유(有)의 반대이며, 현상의 가상(假相)은 실체가 없으므로 공한 이치를 알고 그 공한 본체의 세계를 쫒아가기만 하면 역시 공한 본체를 등지게 된다는 말이다. 즉 유와 공의 양변에서 함께 떠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벽의해>의 송에서는 “단지 복숭아 나무 부적을 높이 걸어둔 것은 대낮에 귀신이 문을 잡고 흔들까 해서이다. 어찌 석자의 띠집 아래 구름과 달, 시내와 산과 함께 고요를 벗함만 하랴”고 했다.
요산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0월 제9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