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일유(二由一有)니 일역막수(一亦莫守)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하나의 막대기에 양쪽의 끝이 있는 것처럼 양변을 이루는 두 가지의 변견은 하나 때문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로 인하여 둘이 있다면 하나와 둘도 결국엔 상대적인 양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을 지양한 하나를 내세워도 안되는 것이다. 가령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크게 그르치는 것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융통자재한 경지가 중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대도(大道)에는 사실 논리의 규정이 있을 수 없다. 철학에서 말하는 단원론(單元論)이나 다원론(多元論)은 중도의 이치에서 보면 다같이 변견에 속한다. 일다(一多)가 서로 용납하여 원융무애한 것이라야 중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심불생(一心不生)하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느니라.)
한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주관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을 말한다. 즉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무심해짐으로써 주관과 객관이 서로 대응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모든 것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져 대립과 갈등 따위의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화엄학(華嚴學)에서 말하는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가 체험된 경지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법을 탓하게 된다. 즉 객관의 경계를 두고 무심하지 못하면 시비를 일으키게 되고 남을 탓하게 된다. 흔히 중생의 경계에는 공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 문제 아닌 것을 문제삼아 번민하고 괴로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4월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