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부주(二見不住)하야 신막추심(慎莫追尋)하라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두 가지의 견해란 상대적으로 대립된 양변(兩邊)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변견(邊見)을 말한다. 즉 ‘있다’와 ‘없다’의 유(有)와 무(無), ‘옳다’와 ‘그르다’의 시(是)와 비(非), ‘착하다’와 ‘나쁘다’의 선(善)과 악(惡) 등이 두 가지의 견해인 변견이다.
인간의 의식은 분별심이 되어 객관의 경계를 향하여 ‘이렇다 저렇다’는 소견을 만들며, 또한 그 소견이 만들어지면 상대적 입장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로써 경계에 걸리어 관념의 고집을 만들고 진여자성을 여의게 되므로 이견을 일으키는 경계를 찾아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벽관(壁觀)이라고도 하는 면벽관심(面壁觀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좌선할 때 얼굴을 벽으로 향해 앉아 눈에 들어오는 객관의 경계를 막는다는 것으로서, 주관과 객관의 통로를 차단하여 객관의 경계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재유시비(재有是非)하면 분연실심(紛然失心)하리라
(조금이라도 시비가 있으면 어지러워 본래 마음을 잃으리라.)
경계를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는 분별시비가 일어나면, 마음은 이미 경
계에 의해 지배되어 본래의 마음이 아인 관념에 불들어진 마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마치 하늘에 구름이 끼이면 본래의 청명한 모습이 보지이지 않는 것처럼, 진여자성은 은몰(隱沒)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별은 항상 양변(兩邊)에 나아가 두가지의 견해를 이루는데, 이것이 곧 망견(妄見)이니 이러한 망견을 쉬면 자성(自性)이 드러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숨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자성을 관하는 공부는 분별시비가 멈춰질 때 시작되는 것이다.
<벽의해(闢義解)>에서는 송(頌)하기를,
설유시비무시비(說有是非無是非) 시비가 있다 없다 말하는 것도 / 중문고계대수귀(重門高啓待誰歸) 겹문을 높이 열어놓고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참천형극횡관로(參天荊棘橫關路) 하늘까지 뻗친 가시덤불 길을 가로막았으니 / 나개행인불괘의(那箇行人不掛衣) 어느 행인인들 옷이 걸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