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설에서는 업에 의해서 그 과보를 받는 상태가 윤회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업이 윤회의 주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얼핏 생각하면 업이 바로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법무아설(諸法無我說)을 내세우는 근본 교리의 입장에서, 윤회의 주체가 있다고 한다면 서로 상충되는 이론이 되고 만다. 결론은 윤회를 거듭하되 윤회하는 주체는 없다는 것이다. 업 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과(因果)의 법칙을 밝히는 이야기다. 동시에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윤리적 측면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과성과 윤리성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업 이론이다. 여기서 인과의 성질은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다. 다만 선악의 도덕적 기준은 인간의 윤리적 의식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사고다. 업 자체는 선악이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윤리의식에서 볼 때 선악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업이 행해지는 하나의 행위가 끝나면 행위자체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행한 존재 안에 어떤 흔적이나 세력을 남겨 놓는다. 마치 향을 태우면 향 자체는 타서 없어지지만 향의 냄새가 옷이나 천 같은데 배여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업이 남긴 세력을 업력(業力)이라 하는데, 이것이 잠재적인 에너지로 남아서 때를 기다려 업력의 성질과 일치성이 있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존재들은 업력을 싣고 다니는 활동체다.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 동력이 모두 업력이다. 이것이 죽은 뒤에는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
업은 존재하는 자의 현재 운명이나 미래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업으로 인해 모든 존재가 만들어진다. 가령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사람으로 태어나고 짐승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업이 지어지고 나서 그 과보가 나타날 때까지 경과되는 시간은 일정하지가 않다. 마치 식물의 종자가 발아하여 뿌리를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종자마다 다르듯, 업이 결과를 초래하는 과보를 받는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3가지로 구분하여 삼시업(三時業)이라 하는데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과보를 받는 업은 순현업(順現業)이라 하고 내생에 받는 것은 순생업(順生業), 그 다음 생에 가서 받는 업은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또 과보를 받게 되는 때가 정해져 있는 업을 정업(定業)이라 하는 반면 정해지지 않는 업은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업은 지으면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되지만 그 결과가 항상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과보를 받느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대체로 선업은 선도에 태어나고 악업은 악도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천상세계나 인간은 선도이고, 지옥, 아귀, 축생은 악도이다. 또 지극히 상식적인 견해로서 도덕율에 입각하여 과보를 예측해서 말하기도 한다. 가령 살생(殺生)업을 많이 지으면 병에 잘 걸리거나 수명이 짧아지며 투도(偸盜)업을 많이 지으면 가난하게 태어난다. 그리고 사음(邪淫)을 일삼으면 올바른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는 등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윤회를 한다면 바로 이 영혼의 존재가 다시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도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어떤 존재가 죽어 육체가 없어지면 영혼과 같은 존재인 아뜨만(atman)이라는 자아(自我)나 지바(jiva)라는 생명원리가 있어 윤회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아(anatman)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윤회를 한다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일정하게 옮겨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통해서 계속하는 것이므로 고정된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난다 할 때 죽은 자와 태어난 자 사이에 불가분리의 관계는 있으나, 죽은 자가 바로 태어난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천년 전에 땅에 심어졌던 밀 알이 천년 후의 밀 알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천년 전에 밀밭에 심어졌던 밀 알이 천년 후의 밀밭에서 수확한 밀 알과 동일하지는 않으며, 없어지고 생겨나는 현상의 반복이 있다 하더라도 고정 불변의 실체가 이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없어지고 생겨나는 것은 변화의 과정이며 이 변화의 과정을 이어주는 것이 업력이다. <밀린다 팡하>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다시 태어나는 자와 죽은 자는 다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난 자는 죽은 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3월 ((제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