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
선재동자가 여쭈었다.
“위대하고 거룩한 이여, 어떻게 예배하고 공경하며 나아가 회향하오리까?”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계시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을 내가 보현의 수행과 서원의 힘으로 눈앞에 대하듯, 깊은 마음으로 믿고 이해하여 몸과 말과 뜻을 깨끗이 해서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되, 한 분 한 분 부처님 계신 곳에 모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먼지 수만큼 많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니라.
이리하여 허공계가 다하면 나의 예배도 다하거니와, 허공계가 다할 수 없는 까닭에 나의 예배도 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며, 이와같이 해서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도 다하거니와, 중생계나 번뇌가 다할 수 없는 까닭에 나의 예배와 공경도 다함없이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고 하는 것이니라.”
<풀이>
모든 종교는 예경하는 마음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교조에 대한 예배와 공경은 그 신자로서 응당 지녀야 할 예법이다. 신을 믿는 서양의 종교에서는 종교의 본래 뜻을 ‘예경’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어로 종교를 ‘relig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religio’에서 유래된 말로, 그 어원의 뜻은 ‘예경’또는 ‘결합’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종교란 인간이 신에 대해 예배를 드리고, 인간과 신이 관계를 맺고 결합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신을 전제하지 않으므로 신학적인 의미가 없으나, 예배 자체가 하나의 수행행위로 간주된다. 부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발심의 훈련임과 동시에 스스로를 낮추어 아만을 제거하고 진리를 따르려는 결의를 표현함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 갖추어진 자성의 공덕을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여래의 공덕을 저장하고 있는 창고인데, 이 창고의 문을 여는 행위가 ‘예배’란 말이다. 시쳇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찰을 순수한 우리말로 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절을 많이 하는 곳’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 중에서 절만큼 절을 많이 하고 사는 곳은 없다. 총림을 이룬 대중이 많은 큰 사찰에서는 스님네 상호간 하루에도 수십 번 합장하고 절하며 인사를 나누고 생활한다.
또한 절을 많이 하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함을 의미한다.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은 곧 우리들의 염원을 부처님께 비는 신앙심의 발로이다. 기복심리가 일부 비판을 받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기실 복을 비는 것은 인간의 원형적인 심리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원시적인 삶의 원형적 모습이 들어 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무사히 궤도진입을 바라는 고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 최첨단의 과학문명이 가장 원시적인 기복심리를 그대로 노출시킨 경우이다. 예배를 한 만큼 감응(感應)이 일어나기도 한다. ‘백팔참회’나 ‘대예참’ 또는 ‘삼천 배’등 불자들의 신심을 키우는 예배는 불교의 기본의례에 속하는 일이다. 이 예배를 어느 정도 하느냐? 한정없이 무한히 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의 무한한 공간 속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들은 그 수효를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먼지 수라고 하였다.
한역 원문의 ‘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는 대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화엄경에서는 우리 마음을 무진장(無盡藏)이라고 한다. 마음 자체가 어떤 한정된 범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뜻에 입각해서 실천하는 보현의 행원은 무수 무한으로 거듭거듭 증대해 나간다. ‘허공계가 다함이 없고 중생계가 다함이 없고 중생의 번뇌가 다함없기 때문에 나의 예배도 다함이 없이 한다’는 이 말은 보현의 극치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이타정신의 극치를 나타낸 말이다. 이 말은 열가지 행원 하나 하나에 후렴처럼 붙어 나온다. 인간의 마음은 깨달음의 본체 그대로이다. 시간적 제한이나 공간적 한정이 없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이므로 그 마음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 보현의 정신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6월 제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