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28) – 중송분 (9)

<경문>

옛적에 지혜의 힘이 없었던 탓에 극악한 오무간업을 지었더라도

이 보현의 대원왕을 외우게 되면 한 생각에 재빨리 죄다 소멸되리라.

태어남에 좋은 가문, 좋은 얼굴, 좋은 몸매와 지혜가 모두 원만해

마군과 외도들이 달려들지 못하고, 삼계 중생 공양을 능히 받으며

지체 없이 보리수 밑에 나아가 앉은 채 모든 마군 항복시키고

등정각을 이루어 법륜 굴려서 널리 일체 중생 이익 되게 하리

만약 누군가가 이 보현원을 읽고 외우고 받아 지녀 연설한다면

그 과보는 부처님만 능히 아시니 반드시 보리도를 얻게 되리라.

만약 어떤 사람 이 보현원을 외우는 것을 내 그 선근 조금만을 말하여도

일념 간에 일체 공덕 다 원만해 중생의 청정한 원 성취하리라.

내 이 보현의 수승한 행의 가없고 빼어난 복 모두 회향하나니

널리 고해에 빠진 모든 중생이 어서 빨리 극락국토 가게 하소서.

그때 보현보살마하살이 부처님 앞에서 이 보현의 넓고 큰 대원을 청정한 게송으로 설하고 나니 선재동자는 한없이 뛸 듯이 기뻐하였고 일체 보살들도 크게 기뻐하니 여래께서 칭찬해 말씀하시기를 잘했다, 잘했다 하시었다.

그때 세존께서 거룩한 여러 보살마하살과 더불어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해탈경계의 수승한 법문을 연설하실 적에 문수사리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여러 대보살들과 및 그들이 성숙시킨 6천의 비구와 미륵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현겁의 일체 대보살들과 무구보현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생보처이며, 관정위에 머무는 여러 대보살들과 그 나머지 시방 일체 세계에서 많이 와 모인 일체 국토의 가는 먼지 수만큼의 많은 보살마하살들과 대지사리불과 마하목건련 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성문들과 인간과 천상과 세간의 모든 임금과 하늘과 용과 야차와 건달바와 아수라와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후라가와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 아닌 이 등 일체 대중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다들 크게 기뻐하고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였다.

<풀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지혜가 없어서 어리석은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수가 범부에게 있어서는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행동의 실수, 말의 실수, 그리고 생각의 실수가 삼업을 통해 일어나게 될 때 이것을 상쇄할 수 있는 새로운 착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기신론》에 서는 앞의 생각에 잘못된 그름을 깨달아 뒤의 생각을 멈추는 것이 깨달음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보현행원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과거의 나쁜 업을 소멸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보현의 행원이 실천될 때 과거의 묵은 악업이 참회되어 약이 병을 퇴치하듯 없어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현원은 무상보리를 얻는 인행(因行)이므로 성불을 기약하는 가장 높은 희망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부처를 희망하는 최고의 가치 의식을 먼저 느끼도록 하는 종교다. 진리에 대한 소신이 바로 서면 가치관 또한 바로 선다. 사람의 생각 속에 어떤 가치 의식이 들어 있느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마음에 대한 가치 의식을, 객관적으로 보는 사물에 대한 이해처럼 느끼기가 매우 어렵다. 단순히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 사이의 인정적인 감사의 차원을 넘어선 지고의 유심 가치를 사람이 알아야 한다. 마음을 ‘값없는 보배’라 한다. ‘값이 없다’는 것은 값을 따져 매길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무가지보(無價之寶)의 마음이 보배로서의 하는 역할이 바로, 보현 행원이다. 전등이 전선에 연결되어 불을 밝혀야 전등의 역할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사람 마음도 보현의 원력이 갖춰질 때 마음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마음의 위대성이나 그 탁월성은 사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자심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정진을 외면하고 방일한 생활을 하는 것은 유심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행원의 왕이 되는 것이다.

보현보살이 설한 행원은 불가사의 한 해탈경계의 수승한 법문이다. 부처님의 공덕이 모두 성취되는 불가사의한 이 법문이 바로 대승의 핵심이요, 자성(自性)의 삼보며 자성의 삼학(三學)이다. 불교의 실천적 수행이 보현의 행원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서 자리이타의 공덕이 원만해지면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실천 완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7월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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