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범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無量劫) 가운데 마음을 등져서 오직 모든 법을 관조하되, 법에 얽매여서 자유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관하여 깨달으면 법을 가히 얻을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색법(色法= 質量의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니 일어난 마음을 돌이켜 관하면 그 일어난 곳이 없다. 실로 가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항상 색(色= 質量)이 없으면 무엇을 쫓아 있겠는가. 오히려 저 헛된 꿈과도 같음이니 생각도 집착도 하지 않으면 저 법의 자재함을 얻고 내지 일체 법을 가히 얻을 것이 없으며 일체 법에 섭수되지도 아니하고 어느 곳에나 자재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마음을 깨달아도 깨달은 마음이 없고 경계를 요달(了達)하나 요달한 경계가 본래 없어서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 요달하되 가히 요달할 바가 없다. 탄연(坦然)히 거리낌 없으므로 자재(自在)이다. 보(菩)는 요달을 말하는 것이오, 살(薩)은 견(見)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법을 요달하여 보매, 본래 텅 비고 고요하므로 이름하여 보살(菩薩)이라 한다. 鬧會요회마 眼裏聞聲方始知 안이문성시방지 이 모든 것을 알겠는가.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안다. [3].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心般若波羅蜜多時) 밖으로 법을 구하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이 본래 스스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건만 소승(小乘)의 마음으로 망녕되게 말과 글로 구하는 견해를 부수어 주는 것이다. 지혜의 이름을 반야(般若)라 하고, 모든 망상을 쉬면 청정함으로 바라(波羅)라 하고, 보는 견해가 텅 비어 한 몸을 합하여 이룸으로 이름을 밀(蜜)이라 한다. 모든 법을 통달하여 기억하고 생각하여 가짐으로 다(多)라고 한다. 마음을 등지고 법을 구하며 망녕되아 닦아 증득(證得)함을 두어 성문승(聲聞乘)에 떨어지니 이름하여 얕은 반야라 한다. 이제 다시 깊은 반야라 한다. 이제 다시 깊은 반야를 실천함을 열거하여 대승(大乘)으로 앞의 잘못됨을 부순다. 보살(菩薩)이 모든 법을 요달하여 보면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실로 나고 멸함이 없으므로 반야라 한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안과 밖이 뚜렷히 통함으로 바라라 한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으니 마음과 법이 둘이 아니므로 밀이라 한다. 마음 성품이 온갖 법을 꾸렸으므로 닦아 증득함을 빌리지 않는 것을 다(多)라고 한다. 이와 같이 깨닫는 것을 이름하여 대승이라 하나니 이 이름이 행심반야바라밀다(行心般若波羅蜜多)이다. 시(時)는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을 모두 얻을 수 없으므로 시라 한다. [4].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五蘊)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하는 것이다. 정미(精微)로히 밝아서 눈이 항상 경계를 바라보므로 색(色)이라 한다. 모든 법을 탐하여 구하고 수행하여 증득함을 바라므로 수(受)라 한다. 모든 법의 인연에 얽히어 유출(流出)이 쉬지 않으므로 상(想)이라 한다. 청정한 계율울 정묘(精妙)로히 지켜서 만행(萬行)을 수행하는 것을 행(行)이라 한다. 여러 가지를 분별하여 법을 따라 유전(流轉)하는 것을 식(識)이라 한다. 이 다섯 가지 법의 장애를 입어 깨닫지 못하므로 온(蘊)이라 한다. 삼계(三界)에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輪廻)가 멈추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고액(苦厄)이라 한다. 보살(菩薩)이 자기의 마음 근원이 본래 청정한 줄 살펴 요달하니 앞의 다섯 가지의 법이 생긴 곳이 없고 본래 비고 고요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가히 얻을 것이 없으므로 오온(五蘊)은 이 모두 텅 빈 것으로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을 건넜다. 要見本來面孔 요견본래면공마 擧頭靑鶴過山城 거두청학과산성 본래의 모습 비공(鼻孔)을 보려느냐. 머리를 드니 푸른 학이 산성으로 날아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