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부처님의 생애
제2장 성도하기 까지
- 성도
이때 웃다카 교단에서 수도하던 다섯 사문들이 싯다르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수행했지만 스승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젊은 사문이 짧은 기간에 스승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경지를 향해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분은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반드시 최고 경지에 도달할 분이다.’
이렇게 판단한 그들은 서로 의논한 다음 웃다카의 교단에서 나와 싯다르타의 뒤를 따라온 것이다. 싯다르타는 이런 결심을 했다.
‘사문들 가운데는 마음과 몸은 쾌락에 맡겨 버리고 탐욕과 집착에 얽힌 채 겉으로만 고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몸과 마음이 탐욕과 집착을 떠나 고요히 자리잡고 있어야 그 고행을 통해 최고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고행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굳게 결정한 뒤, 싯다르타는 참담한 고행을 다시 시작했다. 아무도 이 젊은 수행자의 고행을 따를 수는 없었다. 싯다르타 그 당시 인도의 고행자들이 수행하던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했다. 먹고 자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몇 톨의 낟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는 때도 있었다.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 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직도 완전히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넘지도 못했다.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고행을 계속했다. 곁에서 수행하던 다섯 사문들은 너무도 혹독한 싯다르타의 고행을 보고 그저 경탄의 소리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렇게 뼈를 깎는 고행이 어느 정도 수행에 보탬을 주기는 했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바라는 깨달음에는 아직도 이르지 못했다. 번뇌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생사의 매듭도 풀리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언젠가 남들이 하는 고행을 보고 비웃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닦고 있는 고행은 죽은 후에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육신의 번뇌와 망상과 욕망을 없어버림으로써 영원한 평화의 경지인 열반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얻은 평화를 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깨닫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그는 거듭 결심을 다졌다.
그는 이따금 모든 고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삼매경에 들어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삼매는 곧 흩어지고 현실의 고뇌가 파고들었다. 고행을 시작한 지도 다섯 해가 지나갔다. 아무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지독한 고행을 계속해 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고행에 대해 문득 회의가 생겼다.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괴롭히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맑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고요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 동안 싯다르타는 수행의 방법에만 얽매인 나머지 점점 형식에 빠져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가지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그는 고행을 중지하고 단식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란자라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었다.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소녀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를 얻어 마셨다. 그 소녀의 이름은 수자타라고 했다. 우유의 맛은 비길 데 없이 감미로웠다. 그것을 마시고 나니 그의 몸에서는 새 기운이 솟아났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토록 고행을 쌓고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세상 사람이 주는 음식을 받아 먹으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고행을 그만둔 싯다르타가 타락했다고 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싯다르타는 홀로 숲속에 들어가 커다란 보리수 아래 단정히 앉았다. 맑게 갠 날씨였다. 앞에는 네란자라강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마음은 날 듯이 홀가분했다. 모든 것이 맑고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다. 싯다르타는 오랜만에 마음의 환희를 느꼈다.
그는 다시 비장한 맹세를 했다.
‘이 자리에서 육신이 다 죽어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싯다르타는 평온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깊은 명상에 잠겼다.
이렇게 해서 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둘레는 신비로운 고요에 싸이고 샛별이 하나 둘 돋기 시작했다.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의 마음이 문득 형언할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두려워할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이치가 그 앞에 밝게 드러났다. 태어나고 죽는 일까지도 환히 깨닫게 되었다. 온갖 집착과 고뇌가 자취도 없이 풀려 버렸다. 우주가 곧 내 자신이고 내 스스로가 우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때 싯다르타는 환희에 넘쳐 함성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평화와 자신이 넘치는 밝은 빛이 깃들었다.
그때 네란자라강 저너머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그토록 자신이 ‘부처’ 가 되었다고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다. 스물아홉에 태자의 몸으로 카필라의 왕궁을 버리고 출가한 젊은 수도자는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매던 끝에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즉 ‘깨달은 사람’ 이 된 것이다. 그때 싯다르타의 나이 서른 다섯 살이었다.
이제는 그에게서 인간적인 갈등과 번뇌는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서 일찍이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으뜸가는 열반의 경지를 스스로 깨달아 얻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스승 부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된 싯다르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생각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가 처음 출가하여 수행한 동기는 우선 자기 자신의 구제에 있었다. 생로병사라는 인간 고뇌의 실상을 보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와 왕자의 지위도 내던지고 뛰쳐 나왔던 것이다. 이제 보리수 아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자 자기 자신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 해탈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곧 자기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우주의 진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본 부처님의 자비였다. 그는 이제부터 중생들을 구제하는 길에 나서기로 새로운 뜻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