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기본교리

사성제(四聖諦)

제(諦)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진실, 사실, 진리등을 가리키는데 쓰이며, 동시에 엄숙 한 단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데에서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집→멸’을 알고 도에 이르는 바른길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고성제의 뜻 (苦聖諦)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八苦)을 들고 있다.

‘어떤 것이 고성제인가?’ 생(生)하고, 늙고, 병들어, 죽고, 미운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 나라고 取着된 몸과 마음)은 괴로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2) 집성제의 뜻 (集聖諦)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아리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한자의 뜻대로 ‘모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집기(集起)라고 하면 뜻이 더 잘 통할 것이다.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애(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등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의 뜻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 탐등의 집기라면 멸제는 그것을 없애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괴로움 또는 고의 지속에서 해탈하고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라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 혹은 열반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명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4) 도성제 (道聖諦)의 뜻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가지의 수행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곧 팔정도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우는 팔정도가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제집제를 유전(流轉)하는 인과로 나타내고 멸제도제는 깨달음을 위한 인과로 나타낸다. 곧 고 집은 세간의 인과속에서 흘러가는 것이고, 멸 도는 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는 행위이다.

팔정도(八正道)

팔정도는 팔정도지(八正道支) 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이라고도 한다. 불교를 실천 수행하는 중요한 종목을 여덟가지로 나눈 것이다.

팔정도는 이 수행 방법이 중정(中正) 중도(中道)의 정도로서 완전한 수행 방법임으로 성인의 도로 나타내어 성도(聖道)라고도 한다.

(1) 정견 (正見)

정견은 [바로봄]을 뜻한다. 곧 올바른 견해이다. 이 정견은 유무(有無)의 편견을 벗어난 정중(正中)의 견해이다. 곧 사(사)와 정(正)을 분별하는 견해이고 바른 견해로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한다.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2) 정사유(正思惟)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게 사유한다.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바’와 ‘생각 안할 바’를 바르게 잘 분간하는 것이다.

(3) 정어 (正語)

올바른 말, 곧 온갖 망어(妄語) 사어(사語)등을 하지 않는 말이 정어이다. 올바른 생각에 의해 하는 말이고 항상 바른 생각과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짖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이는 ‘진실되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말한다. 즉 거짓말, 꾸며대는 말, 서로 이간시키는 말, 남을 성나게 하는 말 등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이다.

(4) 정업 (正業)

올바른 행위, 살생이나 도둑질 따위의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5) 정명 (正命)

‘올바른 생활 수단’을 말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전체적인 생활에 있어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으로 남과 나를 다같이 이롭게 하는 바른 직업을 갖는 것도 그 뜻의 하나이다.

(6) 정정진 (正精進)

올바른 노력, 한 마음으로 노력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노력으로 인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나지 못하게 하며, 나지 아니한 선을 발생하게 하는 일이며, 옳은 일에는 물러섬이 없고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불자의 구도 자세라 할 수 있다.

(7) 정념(正念)

올바른 정신과 생각, 사념을 버리고 항상 향상을 위하여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하며 바른 생각을 말한다. 또한 ‘바르게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항상 명심하고 기억하여 다른 잡념이 일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사유와 함께 내면적인 마음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마음속에 정견 (正見)이 가득차고 항상 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정정 (正定)

‘바르게 집중(集中)’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는 정념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정념의 성취로 몸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지극히 잘 조화되고 통일된 마음에 온갖 번뇌와 어지러운 대상이 모두 쉬게 되면서 마치 가을 하늘에 지혜의 달이 뚜렷이 빛나는 경지를 뜻한다.

십이인연

모든 중생들이 불성을 망각하고 현실의 고통바다에서 헤매는 원인과 그 결과를 열두가지 단계로 나타낸 것을 십이인연법이라 합니다. 십이인연법은 십이연기라고도 하며 만상은 실체가 없고 서로 인연따라 일어나고 의지하는 관계라 하는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1.무명(無明)은 어리석음의 근원인 무지를 의미합니다. 어리석고 진리를 알지 못해서 사물의 도리를 옳게 판단하지 못하는「한 생각(一念)」 이 번뇌와 악업을 힘입어 고과를 낳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명은 번뇌의 근본이며 악업의 시초요, 중생을 만 드는 원인입니다.

2.행(行)은 무명이 일으킨 작용을 말합니다. 무명이 작용하여 식을 일으켜 몸과 입과 뜻의 탐진치, 만의(慢疑)등 삼독심 내 지는 오독심을 의미합니다.

3.식(識)은 행의 결과로 얻어진 분별을 의미합니다. 현재의 몸을 조직하는 중심체이며 성격을 형성하는 모체가 됩니다.

4.명색(名色)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말하는데 색수상 행식의 오온 가운데 수상행식의 무형체를 명이라 하고, 지수 화풍의 유형체를 색이라 합니다.

5.육입(六入)은 탁태된 후 눈, 귀, 코, 혀, 몸 뜻이 외계와 접 촉하는 여섯 곳이기에 육입이라고 합니다.

6.촉(觸)은 정신적인 감지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근(根)과 진(塵 ) 과 식(識)을 화합시키는 작용을 말합니다. 출생후 2∼3세 까지의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는 등 외부의 경계에 접촉하는 촉각을 말합니다.

7.수(受)는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를 말합니다. 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고와 락의 감각을 말합니다.

8.애(愛)는 탐욕의 마음으로 즐거움을 구하는 단계로 이해득실의 욕망, 모든 것을 욕구하여 만족을 얻고자 하는 본능적 욕심 특히 재생의 애착을 갖게 함을 말합니다.

9.취(取)는 집착의 단계를 말합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바를 놓 치지 않으려는 아집을 뜻합니다.

10.유(有)는 존재성을 얻는 것. 즉, 애(愛)·취(取)로 말미암아 미래의 결과를 있게 하기 때문에 유라합니다.

11.생(生)은 애·취·유 등에 의해 혹업을 지어 일으켜 다음 세 상에 출생하는 찰나를 말합니다.

12.노사생(老死生)과 노사(老死)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잇달아 생겨나는 죽음을 말합니다. 다시 받은 몸이 병들어 죽는 것을 일컬으며 생받는 자의 필연적인 결과를 의미합니다. 이같이 생명은 갖가지 인(因)이 쌓여 끊임없이 돌고 돌아 끊일 날이 없습니다. 무명을 인연으로 해 삼계육도(三界六途)를 이같은 열둘의 단계로 재현하며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을 십 이인연의 인과라 하는 것입니다.

삼법인 (三法印)

불교의 근본 교의중 삼법인이란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합니다. 여기에 일체개공(一切皆空)을 합쳐 4법인이라 하기도 하지요. 법인(法印)이란 우주법계의 근본 구성원리로 불교의 일정불변한 근본진리란 뜻입니다. 하나하나 풀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 『이 세상의 온갖 것은 변하고 또 변하는 것 그 움직임이 끊임이 없네(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 『변하고 변하는 그 모든 것 서로가 의지하여 도와서 있고 홀로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네(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 『조화를 이룰 때는 안정을 찾고 조화가 깨어지면 일그러지나 또 다시 조화찾아 안정이루네(涅槃寂靜)』

일체개공(一切皆空) - 『이 세상 모든 사물을 이름하여 공이라 하는 하나의 근원에서 만들어 지네(一切皆空)』

이와 같이 4가지 근본원리가 우주 삼라만상을 지배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우주의 통찰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허공에 떠있는 무수한 별의 움직임으로부터 생사의 문제까지 삼법인 사법인에 맞추어 보면 풀리지 아니하는 문제가 없습니다. 헤겔의 변증법도 삼법인을 본뜬것에 불과합니다. 삼법인을 우리의 삶에 응용해보면, 우리의 몸에서부터 거대한 대자연에 이르기 까지 그 모두는 허공으로부터 빨아들인 기운을 호흡하며 그를 바탕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공이라하는 무한자의 세계는 삼라만상의 모두를 형성하는 모체이고, 생물학, 식물학, 동물학 등 제반학문은 공의 세계를 갖가지로 설명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불법의 진수요 요체라 말씀하신 부처님 말씀은 여기에 연원을 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들어져 있는 만상은 모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 하나도 없고 동물은 식물을 밑바탕으로 또 식물은 동물의 썩은 시체를 밑거름으로 생명을 유지해 갑니다. 식물이 없다면, 동물이 존재할 수가 없고, 부모가 없으면 내가 없고, 또 네가 없으면 나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은 이같이 상호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만약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타(他)를 파괴한다면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로 접어들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일입니다. 이같은 상호연관성을 제법무아라 하지요.

또 이같은 연관성은 궁극의 안정을 향해 나아가는 데 이를 열반적정의 차원으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 물결속을 헤치며 생사를 반복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열반적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만큼 그 어느 것도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같은 끊임없는 변화를 제행무상이라 합니다. 삼법인, 사법인이야말로 대자연과 이 우주의 운행에 대한 법칙성을 지극히 과학적으로 구성해 놓은 진리 중의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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