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집념이 강한 생각은 우리를 구속하게 되는데, 소위 지식이 하나하나 늘어나서 학문이 한 가지 한 가지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생명을 구속할 상대가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을 탁 내버리고 살아라. 전세계, 재산 전부 내 것 만들어 놓아도 내것 아니다.
돈 백만원 모아놓으면 돈 한 장 한 장에 내가 구속되는 것이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생명이 구속되는 것이고 좋은 마누라 얻어놓으면 그 마누라가 완전히 나를 구속하는 것이다. 본심자리, 마음자리, 이것이 진짜 나다. 모든 생각의 주체인 자리다. 이것이 모든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온 우주에 이 나를 안거친 게 하나도 없다.
영웅이 되든지 바보가 되든지 일체 사건의 주체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네 정신만 다소곳이 챙겨라.
거기는 호랑이도 못가고 하느님도 못가고 부처님도 못가는 마지막 자리에 도사리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러면 그대에는 이제 까지 쓸데 없는 생각을 했구나, 엉뚱한 데 집착을 했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어가지고 마음의 본연 자세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미련만 근본적으로 끊어지면 잠재의식이 완전히 없어진다.
부처님은 아무생각 없이 남과 얘기하고, 음식을 잡수셔도, 누가 무엇을 물어도 사실대로 받아들인다. 아무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기분에 따라 싸우고 이해에 끌려 남과 통할 수 없다. 제일 가까운 내외 사이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통할 수 있는가.
모든 생각을 초월했을 때, 아무 생각도 없을 때, 또는 그 이상 더 신선할 수 없을 때, 모든 죄악도 복도 초월했을 때, 기분을 떠난 때, 이때가 정말 참 자기이니 이때에야 비로소 서로 이해가 되고 모든 것이 다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오고가고 밥얻으러 나가고 공양 자시고 하는 것이 다 마음 그대로의 인생 전체다. 모든 것을 초월한 이것이 진아행세도 하고 가아행세도 하는데 우주의 핵심이 이것이고 다른 것이 아니다.
가령 우주를 나누면 죽은 것 한쪽과 산 것 한쪽으로 구별된다. 여하튼 어떻게 살아 있든 산 것은 산 것이다. 지금 말하고 말을 듣는 자리는 산것이며, 무정물인 돌, 막대기는 들을 줄도 생각을 낼 줄도 모르는 죽은 것이다. 죽은 것 가운데는 있는 물질과 없는 진공 허공이 있다. 에너지 자체도 죽은 것이며 생명이 없다.
과학이다.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등의 문화는 살아있는 생명세계의 산물이다. 물질계가 죽은것이고 진공, 허공의 무생명체이고 그러므로 산 것은 있는 물질도 없는 허공도 아닐 터이니, 유무를 초월한 비유비무의 본질이다.
본래 생길 수도, 없어질 수도 없는데 진공마저 초월한 이 마음 자리는 모든 것을 초월했고 그러니 영원히 살아 있으며, 대자유이며 절대 평등한 것이다.
인류 문화가 5천년이 아니라 앞으로 5억만년을 진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각으로부터 나는것일 뿐 생각의 주체인 나, 생명 자체의 주인공을 맑힌 것은 아니다. 나라는 말은 네가 아니란 것으로 상대적인 일체를 부정한다. 선도 악도 아니고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이전이고 동시에 일체를 초월한 것이 나라는 뜻이다. 나는 오직 나일 뿐 나에게 무슨 조건을 붙일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며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살고 있다. 부처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결국 사상이 있으면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진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낸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얼마 안 가면 싫어지고 미워한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일 수는 없고 그런 것을 좋다 싫다하고 생각해 내는 주체가 나일 수 밖에 없다.
마음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제 정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름꾼 만나면 노름쟁이가 되고, 술꾼 만나면 술꾼이 되고, 아편쟁이를 만나면 아편쟁이 되고, 도둑놈 만나면 도둑이 되고 깡패 만나면 깡패되어 온갖 곳으로 다 끌려다니며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는 대로 종 노릇 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한다.
그러니 자기를 아는 사람, 마음을 깨쳐 주객을 초월하여 부처를 안 사람은 누구를 따라 가더라도 거기 따라가서 나한테나 남한테나 이익이 되면 따라가지만 이익이 안되면 안 간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따라다니며 덕 될 것 아무것도 없다. 물질로 복을 짓는 것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하나의 부분밖에 안된다. 부처님 말씀에 성욕 같은 것이 두 가지만 더 있어도 성불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은 한번 결심하고 내던지면 돈을 봐도 욕심이 안생기고 또 좋은 부귀공명, 높은 지윈 그까짓것 헌신짝처럼 볼 수 있지만 비구니가 미남자를 볼 때 생각이 아무래도 흔들리고 또 이세 비구가 미녀를 볼 때 아무래도 한번 더 쳐다보고 안보는 체해도 옆눈으로라도 한번 슬쩍 보게 된다. 그러니까 끊기가 참 어려운 것이어서 이놈 같은 것이 두 가지만 있다면 성불할 사람 아무도 없다.
나를 죽이는 사람도 적이 아니요, 살리는 사람도 은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해롭게 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한테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은 오히려 쉽다. 기가 막히게 죽자 하고 그야말로 나를 숭배하고 나를 따르고 온갓 것 갖다 대접하고 그게 생명을 바쳐서 나를 위하려고 하니 나를 따르는 그런 이를 고맙게 안 생각하는 것이 맞아 죽어가면서 원망 안하기보다 참 어렵다.
남한테 아주 분한 소리를 들으면 생각할수록 분이 더나서 밥을 먹을 수 없게 된다. 저녁에 드러누워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벌떡 일어나 앉게 된다. 날만 새봐라 칼을 가지고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분한 생각 하나로 골똘하게 될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중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딴 생각을 멈추고 한 가지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고 화는 화를 낳는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을 멀리에서만 찾으려 하는데 가장 가까운 내 마음 안에 계시면서 이 세상을 커다란 배로 한다면 그 배의 노를 젓고 있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거친 노도를 넘도록 무한의 힘을 불어 넣어주는 은인으로 생각하여 그에 감사해 하고 작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서로 사랑해서 부처님의 한 나무의 가지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무아의 사랑을 주는 자만이 그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염념히 마음의 고요를 찾아서 번뇌망상을 저버리고 고요한 마음의 힘을 길러 고요한 가운데서 부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여기에 내가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고요에서 와서 고요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염불이나 참선하는 수도인들이 처음에는 잠과 잡념과 고통에 시달려서 공부가 잘되지 아니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본다. 밖으로 나가서 가벼운 운동을 해 보기도 하고 산책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해 보기도 하고 높은 나무에 올라거서 잠과 싸워보기도 하고 돌을 짊어지고 왔다 갔다 하며 참선을 해보아도 잠이 퍼붓고 잡념만 나기 때문에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기도 하며 칼을 턱 밑에 받치고 만져 보기도 하며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도록 가지 가지 방법으로 애를 써 가다 보면 차차로 잠도 없어져 가며 잡념도 덜해져서 가끔 하루나 2,3일씩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염불이나 참선의 일념으로 쭉 나가는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공부에 힘을 얻고 자신이 생겨서 공부할 재미가 붙는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용기 백배로 정진하면 멀지 아니하여 이 마음을 깨닫고 대도를 성취하여 생사를 초월하게 된다.
淸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