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리 삼성암의 나반존자
수유리의 화계사에서 2km정도 올라기면 삼각산 중턱에 삼성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이 절은 화계사에 속한 암자로 조선 고종 9년(1872)에 고상진이 창건하고 처음에는 소난야라 하였다. 난야란 말은 아란야(Aranya)의 준말로서 적정처, 무쟁처, 원리처라 번역한다. 다시 말해서 고요한 곳, 시끄럽지 않은 곳, 한 적한 곳으로서 수행하기에 적당한 숲속이나 넓은 들, 또는 모래 사장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통 촌락에서 1구로사나 반 구로사 정도 떨어진 곳이다. 구로사는 인도의 척도 가운데 하나로 소의 울음소리나 북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를 말한다. 1O년 뒤인 1882년 박선묵이 독성각을 짓고 독성님을 모신 뒤에 삼성암이라 하였다. 칠성각은 1936년에 동운이 지었으며 그 후 1942년 7월 심한 폭우와 산사태로 말미암아 쓰러진 것을 화계사 주지로 있던 회경이 중창하였다.
현재는 박세민 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퇴락하거나 협소한 당우를 보다 못해 크나큰 원력을 세워 새롭게 도량을 가푸어 놓았다. 또한 지금은 조계사의 직할 사암으로 소속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나한도량,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기도처는 유명한 곳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청도 운문사 뒷산에 있는 사리암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이곳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삼각산 삼성암이다. 삼성암 천태굴의 나반존자는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원래 이 절이 처음 창건되기 이전에 이 절의 창건주인 고상진을 비롯하여 박선묵, 유성종, 서윤구, 이원기, 장윤구, 유재호 등 일곱 명의 신도들은 천태굴에서 나반존자 독성기도를 삼일간 마치고 절을 창건하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 기도가 끝난 후 일곱 사람들은 모두 가피를 얻어 지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처럼 창건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삼성암은 독성기도 도량으로 전해오면서 수많은 영험 기적들을 갈무리하고 있다. 지월스님(1911–1973)에게는 속가로 먼 친척뻘 되는 사람 중에 임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선달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보통 임 선달이라 불렀다. 이 임 선달에게는 수동 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척추를 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곱사등이가 되고 말았다.
그럼, 지월스님이란 어떤 분인가. 그는 10세기 한국 불교의 위대한 선지식으로서 천진도인이라 불렸던 고승이었다. 지월은 그의 호며 법명은 병안이었고 이름은 김봉만이었다. 1911년 2월 4일, 전북 남원군 동면 인월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오역 씨였고, 그는 I916년 열여섯 살의 나이에 오대산 월정사에서 지암종욱을 은사로 출가 득도하였다. 그의 수도 생활은 철저하였다. 상원사 한암중원선사를 모시면서 정진하던 그는 1935년 범어사에서 일봉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월면선사에게 법을 묻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본디 생각이 없었지만 대중들의 간곡한 청을 물리칠 수 없어 잠시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평생을 자비와 인욕으로 산 분이었다.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선사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1973년 3 월 27일 입적하였다고 한다. 이 지월 큰스님이 광주에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렀다가 친척 뻘 되는 임 선달의 집을 방문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큰스님. 어인 일로 저희 집을 다 찾아 주셨습니까?” “공주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어떻게 사는가 보려고 잠시 들렀네. 그래 살기는 괜찮은가?” “예, 경제적으로야 그리 큰 어려움이 없는데, 얼마 전부터 제 아들 녀석이 척추병을 앓더니 마침내 곱사가 되고 말았지 뭐겠습니까?” “그럼 병원엘 데리고 가야지. 병원에서는 뭐라던가?” “의사들도 곱사는 고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지요.
그것도 다 제 팔자라면요.” “허! 이 사람, 팔자 타령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세. 어디 내가 그 아이를 좀볼수 있을까?” “그럼요, 당연하지요.” 임 선달은 아들 수동이를 데리고 나왔다. 열댓 살 정도 얼굴은 수려하게 잘 생겼는데, 그만 안타깝게도 안팎으로 등과 가슴이 튀어나온 곱사가 되어 있었다. 지월스님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수동이라고 합니다.
임수동.” “나이는 몇 살이지?” “올해 열일곱 살입니다.” “너 기도 한번 해보지 않겠니? 네가 마음만 굳게 먹으면 기도해서 너의 그 곱추병을 치료할 수도 있을 텐데.” 수동이는 눈망울을 반짝이며 지월스님 앞으로 바싹 다가 앉았다. “병만 고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물론 아 버지께서 허락하셔야 하겠지만.” 수동이가 말을 마치며 아버지 임선달을 바라보자 임선달이 고개를 고덕였다. “네, 하겠습니다. 큰스님께서 가르쳐만 주시면 힘껏 기도를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월스님은 소년 수동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 왔다. 6, 25전쟁이 일어난 직후여서 가는 곳마다 전쟁이 스쳐 간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폐허가 된 건물이나 불탄 자리들이 아직도 쓰라린 경험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지월스님은 미아리고개를 넘고 수유리로 들어섰다. 허허벌판 에 가끔씩 보이는 집들이 마치 시골을 연상케 했다. 화계사에서 점심 공양을 한 스님은 수동이를 데리고 산에 올랐다.
“스님, 산세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서을 주변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산천이 있었습니까? 이 산은 이름이 무엇인지요?” “좋으냐? 이 산은 북한산 줄기로처 도봉산과 함께 서울을 지켜 주는 삼각산이라고 한단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암자가 하나 있는데 삼성암이라고 한다.” “삼성암이라면? 그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별이 셋이란 의미 인가요?” “그게 아니다. 삼성암의 삼성은 세 분의 깨달은 성자를 모셨다는 의미란다.
이 세 분의 성자는 보통 산신과 독성과 칠성을 모시기도 하구 칠성 대신에 용왕을 모치는 곳도 있단다. 여기 삼성암은 독성님이 특히 영험이 있으시단다. 독성님은 나반존자라고도 하지.” 수동은 나반존자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집에 있을 때, 어떤 스님이 와서 나반존자에게 기도를 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던 말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저, 큰스님. 나반존자란 어떤 분칩니까?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허, 그 녀석. 기도도 시작하기 전에 벌써 불교 공부를 다해 버리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내 얘기해 주마.” 지월스님은 그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나반존자에 대해 설명 을 했다.
다소곳이 듣고 있는 수동에게서도 진지함이 엿보였다. “나반존자의(나반)이란(나한)이라는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여지는구나. 독성이니 독수성이니 하기도 하는데 머리카락이 희고 눈쉽이 긴 모습을 하고 있는 성자란다. 부처님에게는 1,255명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열여섯 명의 위대한 깨달음을 이룬 제자들이 있었단다.
그들을 16성이라고도 하고 16나한이라고도 하지. 나반존자는 그 가운데 한 분인데, 원 이름은 핀돌라브하라드바자(Pindolabharadva)라고 한단다. 한문으로(부동이근)이라 번역하며 그 뜻은 남인도 마리산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온 세상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다는 의미란다. 또는 그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풍모는 늘 중생 들을 위해 쓰는 데 변함이 없고 끊임이 없다는 뜻도 있지. 어때? 알아듣겠느냐”
수동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오나 이해하려 노력하고는 있습니 다.” “그래. 그럼 좀더 재미있게 얘기해 주마. 이 나반존자는 원래 발차국 구사미성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큰 장사꾼이었지. 나반존자는 어려서 불교에 귀의하였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는데 하도 열심히 정진을 하여 남보다 훨씬 빨리 도를 깨닫고 여러 곳으로 전법의 길을 떠나곤 했단다.
그러던 중 부처님께서 도를 깨달으신 지 6년째 되던 해에 이 나반존자가 왕사성에서 신통을 부렸다가 부처님께 꾸지람을 들었단다. 부처님은(나의 제자는 신통을 부리는 것으로 능사를 삼아서는 안 된다. 오로지 바른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셨거든. 그 뒤로 나반존자는 서구야니주에 가서 교화하도록 부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지.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돌아오니, 부처님께서는 나반존자에게 열반에 들지 말고 미륵부처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마리산에서 기다리라고 한 거야. 그래서 지금도 나반존자는 남인도 마리산에 머물고 계신단다.
게다가 나반존자는 중생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낫게 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고 세상사람들의 위대한 복전이 된 거란다.”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삼성암이 솔밭 사이로 보였다. “독성님은 곧 나반존자님을 일컫는 말이고 독성기도를 할 때는(나반존자)라는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거란다. 다 왔구나. 수동아 어서 손 씻고 기도 준비를 하거라.” 지월스님이 목탁을 잡았고 수동은 뒤에서 열심히 절을 하며 오로지 나반존자만을 열심히 염불했다.
기도 기간은 우선 1백일을 잡았다. 정말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때로는 침식조차도 잊고 기도에 전념했다. 공양 시간과 해우소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기도에 매진하였다. 하루에 잠은 네 시간을 잤다. 백일기도에 전혀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4시에 기도를 시작하면 자정이 되어서야 법당에서 내려왔다. 무엇보다 지월스님의 원력이 대단했다. 수동은 본인 자신의 병을 고치겠다는 것이었지만 지월스님은 수동의 곱추병을 낫게 하겠다는 보살의 마음이었다. 50일이 지나고 다시 70일을 넘겼다.
그리고 다시 1백일이 되었다. 회향하는 날 사시에 이르렀을 즈음 수동은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 어느 정도 긴장도 풀렸음에서 인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떤 사미승이 나타났다. “수동 처사님, 저와 함께 어디를 좀 가십시다.” “가다니, 어디를 말이오?” “가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오시오.” 사미는 앞서 걸었다. 수동은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려 사미를 따라갔다. 온갖 기이한 풀과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곳이었다. 주위의 깎아지른 절벽이 곧장 수동을 향해 덮칠 것 같았다. 사미는 절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수동도 사미를 따라 절벽을 기어올랐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절벽을 올라서니 커다란 샘이 있었고 그 샘 옆에 바가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사미는 자신이 먼저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는 물을 떠서 수동에게 건네 주었다. 수동은 그 샘물을 마셨다. 물맛은 이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을 정도로 향긋하고 시원했다. 물을 마시고 나서 한참을 더 올라가니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아래 웬 노승이 앉아 있었다. 노승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눈썹은 유난히 길었으며 승복을 입고 있었다. 수동은 자신도 모르게 노승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노승이 말했다. “거기 앉거라. 네가 수동이라 했느냐? 참으로 가엾구나.” 수동은 노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미가 노승 옆에 서 더니 귓속말로 노승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네가 나반존자 백일기도를 했구나.” “네, 백일기도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장하구나 내 너에게 선물 하나를 주고 싶은데 거절하지 말고 받아라.” 수동은 선물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노승은 그 긴 장삼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고집어냈다. 금침과 은침이었다. “이 침을 맞으면 네 곱추병이 낫게 될 것이다.
다 네가 열심히 기도한 덕으로 되는 것이니 고마워할 것까지는 없느니라.” 노승은 말하면서 한 손으로 금침을 잡아 수동의 앞가슴을 찔렀다. 전혀 느낌이 없었다. 노승은 다시 은침을 잡아 등에 꽂 았다. 역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침은 끝까지 다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승이 말했다. “앞으로 한 달 정도면 네 곱추병은 깨끗이 나을 것이다.
그 동안이라도 기도를 열심히 하도록 해라.” 수동은 신기해서 노승에게 물었다. “정말 나을 수 있는 건가요?” “그래 꼭 나을 수 있다.” 말을 마치고 노승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짚고 있던 주장 를 허공에 던졌다. 주장자는 갑자기 하얀 학으로 변했다. 노승은 그 학을 타고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노스님을 불렀다.
“스님! 스님!” 지월스님은 기도를 하다가 수동이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보았다. 수동이는 엎드려서 손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 싶어 수동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이 녀석, 꿈을 꾼 게로구나.” 수동은 지월스님이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던 수동은 깜짝 놀랐다. 단 위에 모셔진 독성님을 어디선가 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분이었구나. 나반존자님이셨구나. 틀림없이 그분은 나반존자셨어요.” 지월스님은 짐작했다. 기도 성취가 이루어졌음을 수동의 표정과 언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수동은 기도회향을 하고도 한 달 동안을 더 삼성암에 머물면서 나름대로 기도를 했다. 과연 수동의 몸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한 달이 지나니 이젠 완전히 나아 보통 사람과 똑같이 되었다. 지월스님과 수동의 기도를 처음부터 보아 온 삼성암 신도들은 공연히 헛고생한다며 비웃기도 했었다. 속병이나 두통, 또는 기타 다른 병이라면 모르되 곱사가 어떻게 기도로 나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한 조소를 일축하면서 그들은 열심히 기도에만 매진했었다. 수동의 곱추가 완전히 낫고서야 삼성암의 신도들은 물론 서울이나 수유리 사람들도 비로소 나반존자 독성기도가 얼마나 영험이 있는가를 알았다. 수동이 삼성암을 떠나는 날, 수많은 사람들이 수동의 쾌유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공주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임 선달도 자리를 함께 했다. 순식간에 삼성암에는 수백 수천의 인파로 발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지월스님은 법문을 했다.
“이곳 삼성암은 이제 창건된 지 불과 1백 년도 못 되는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도 운문사 사리암과 함께 중요한 나한도량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기도란 본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엄격히 따진다면 도량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량이 좋을 때는 기도 성취가 빠르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바로 환경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측간에서는 향내를 맡을 수 없고 법당에서는 구린내를 맡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법당에 있으면 향내를 맡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향내가 코로 스며들고 옷에 스며들어 가며 측간에 있으면 아무리 구린내를 맡지 않으려 해도 코에, 옷에 구린내가 배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관음도량에서는 관음기도가 잘 되고 지장도량에서는 지장기도가 잘 되듯이 독성도량에서는 독성기도가 빠른 것 입니다. 기도는 성취의 가능과 불가능이 기도하는 자에게 달려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도량에서 기도를 한다면 그 성취는 더욱 빨리,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지월스님은 본디 조용하고 말이 없는 분이지만 한번 사자후를 토해 내기 시작하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고 나서야 끝을 내곤 했다.
한편 수동은 삼성암을 나와 고향 공주로 돌아왔다. 그는 그 후 결혼을 했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얘기는 ‘삼성암 독성기도 영험기’에 적혀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