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여인의 기도

민 여인의 기도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16세기 초 중종년간의 일이다.

서울의 남산중턱에 한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극재라 하였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는데 민씨였다.

그 선비는 생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허구한날 책만 읽었다. 부인 민씨가 간신히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웃집 허드렛 일이며 친정의 일까지 도맡아 하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곤 했다. 민 여인은 어릴 때부터 착한 마음씨에다 부처님을 믿는 독실한 불자였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절에 가는 것은 아예 포기할 정도였다.

그녀는 집에서 기도하고 집에서 염불하고 집에서 경을 읽었다. 참선도 집에서 했다. 그녀는 남편의 영달을 위해 기도했다. 절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죄송스러워 더욱 열심히 부처님을 그리워하며 기도했다. “부처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게 해주십시오. 제 남편이 벼슬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되면 부처님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나이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스님네에게도 공양하겠습니다. 불사에 힘쓰겠습니다. 절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도 성심껏 공양하겠습니다. 부처님, 도와주옵소서. 간절히 간절히 비옵니다…” 그녀는 기도하고 염불하고 경을 읽고 참선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비로운 마음,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제일의 염불이요 기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 1년, 남편 백극재는 과거에 응시했다.

기도의 공덕이었을까.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마침내 강원도 울진 부사를 부임 받았다. 둘은 너무나도 기뻤다. 부임지로 향하는 발걸음은 나는 듯 가벼웠다. 풀잎도 나무도 쏟아붓는 햇살 기둥도 모두가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다. 세상이 온통 그들 둘만의 것이었다. 울진에 이르러 축하를 받고, 고을의 형편을 두루 돌아보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사흘째 밤 백 부사는 신음소리 하나없이 숨을 거두었다. 놀란 것은 부인 민씨만이 아니었다. 지방장관들을 비롯해 온 고을 주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동헌으로 모여들었다. 이제껏 한 번도 없던 일이었기에. 정신없이 사흘을 내처 울다가 민 여인은 모여든 장관들과 육방권속들에게 물었다.

“이 고을에 절이 있을 것이오. 특히 영험한 절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이방이 대답했다. “예, 불영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은 오랜 역사를 지닌 절로 많은 영험설화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대웅전 앞에 정중탑이 있고 그 탑을 위하여 세운 탑전 내에 모셔진 부처님이 영험하다고 합니다.” 민 여인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여 임지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들뜬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다. 부처님의 은혜로 영달을 입고도 그 공덕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참회의 눈물만을 짓고 있을 새가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사또의 상여를 그 불영사로 옮겨 주시오.” “절이란 장지가 아니옵니다. 절은 영혼을 천도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기능은 갖고 있으나 시신을 묻을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소. 그러니 어서 그 절로 옮기시오.” “지방장관들이 이미 장지를 북문 밖에 정했습니다만…” “여러 말할 시간이 없소. 어서 사또의 상여를 불영사로 옮깁시다.”

관속들은 지엄한 민 여인의 말을 어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상여를 메고 불영사에 이르렀다. 불영사에서 이 소식을 듣고 원주가 나와 탑전 앞에 관을 안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녀는 손수 목탁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살님, 굽어살피소서. 저의 부군 백부사를 다시 살아나게 해 주옵소서. 저희 내외가 그토록 어렵게 살 때에 부처님께 기도한 공덕으로 남편은 과거에 급제하여 이곳 울진 부사로 명받았습니다. 저 또한 남편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사온대, 어찌하여 이다지도 빨리 저희에게서 기쁨을 거두어 가신단 말입니까. 부처님이시여, 관세음보살님 이시여, 은혜를 다시 한번 베푸시옵소서. 나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기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루 낮이 지나고 밤이 다가왔지만 민 여인의 기도는 여전했다. 민 여인은 참회기도를 올렸다.

“제가 어리석어 잠시 동안 부처님을 잊었사옵니다. 남편의 출세에만 마음이 들떠 부처님의 공덕을 잊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합니다. 다시는 영원토록 제 마음속에서 당신을 잊지 않겠나이다. 부처님이시여, 관세음보살이시여, 당신은 온갖 공능을 지닌 분입니다.

제 남편을 다시 살릴 수 있으십니다. 5년도 좋고 10년도 좋습니다. 다시 환생하여 저희처럼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해 덕치를 베풀 수 있게 하옵소서. 부처님은 삼계의 큰 스승이시고 사생의 자애로운 어버이십니다. 제 남편을 당신의 그 뛰어난 가피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같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본 스님들이 그만 감화되고 말았다.

그들도 함께 목탁을 듣고 기도를 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사흘낮이 지나고 밤을 맞았다.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 하늘의 무수한 별들도 함께 기도에 동참하고 있었다. 산사의 고요한 적막도 탑전을 에워싸고 기도의 음성을 더욱 맑게 만들었다. 가을 밤이라 냉기가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민 여인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털끝만큼도 부처님의 가피력을 의심하는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염불삼매에 들어 생각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다. 그분은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능하지 못한 바가 없다. 부처님은 반드시 내 남편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나의 이 마음은 확고하다.’ 이처럼 기도하는 민 여인의 눈에 불가사의한 현상이 들어왔다. 남편의 시신을 모신 관 틈에서 웬 희뿌연 물체가 나타났다. 밝은 달빛 아래 비친 모습이 분명 여자였다.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로. 민 여인은 더욱더 자신을 염불삼매에 붙들어 두려 애썼다. 그때 그 정체 모를 여인의 입에서 말이 굴러 나왔다.

“나는 이 관 속에 들어 있는 사람과는 10생에 맺은 원한관계에 있다. 그는 내 부모를 살해하고 내 남편을 죽이고 내 자식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철천지 원수다. 그래서 나는 늘 이 사람을 방해하려 하였다. 그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해 왔다.” 민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하겠는가?” “원한이 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과 스님네의 염불공덕에 의해 나는 원결을 풀고 자비로운 마음이 되었다. 나는 원한으로부터 해탈을 얻었다. 더 이상 원한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하늘나라에 가서 나게 되었다. 이 모두가 그대의 간절한 염불삼매 덕분이다.” 말을 마치고는 하늘하늘 날아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민 여인이 산발한 귀녀와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 여인은 한걸음에 관 앞으로 달려들었다. 관을 묶은 매듭을 풀고 뚜껑을 열어 젖혔다. 거기에 백 부사가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수의 풀어헤쳤다. 그러자 백 부사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눈동자에 점차 안정이 깃들어 갔다. 민 여인은 남편 백 부사를 관에서 부축해 내었다. 그리고 불영사 요사채에 방 하나를 얻어 안정시켰다. 사흘 뒤 백 부사는 완전히 기운을 얻어 관아로 돌아왔다.

이 소식이 강원 감사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중종의 귀에 들어갔다. 중종은 소식을 접하고 만조백관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우리와 현재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덕을 펴고 나라를 다스리거니와 부처님의 덕화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도다.” 중종은 이어 말했다. “지필묵을 대령하여라. 긴히 쓸 것이 있느니라.” 종이와 붓과 먹을 대령하자 중종은 어필로써 불영사의 대웅전 간판을 ‘환생전’이라 고쳤고, 요사채 큰 방의 현판을 ‘환희료’라 고쳐 영원히 기념이 되게 하였다.

백 부사는 그 후 1년 뒤 강원 부사로 영전하였고, 다시 얼마뒤 중앙으로 올라와 내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내직에 처하면서도 특별히 불교를 믿도록 허락되었다. 민 여인은 그 후 열심히 부처님을 신봉하였으며, 불영사에 불량답을 사서 시주하고 또한 그 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수시로 공양하였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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