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위해 선 살도 베어 올리리라”

5백년 이어진 숭유배불정책으로 조선시대의 불교는 그야말로 근근히 그 맥을 이어오다가 조선조말 경허 선사의 등장으로 홀연 불교증흥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0년대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북(北) 오대산에 방한암이 있고, 남(南) 덕숭산에 송만공이 있다”는 말이 든든한 버팀목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그만큼 오대산의 한암 스님과 덕숭산의 만공 스님은 당시 우리 불교계를 상징하는 두 거목이셨다.

송만공(宋滿空) 스님은 1871년 3월7일, 전라북도 태인읍에서 출생, 14세의 어린 나이로 야반도주하여 봉서사, 송광사, 쌍계사를 거쳐 계룡산 동학사에서 진암(眞岩) 노사(老師)문하에 머물다가 천하의 선지식 경허 선사를 만나 충남 서산의 천장암에서 경허 선사의 속가 형인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선사를 계사로 득도,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받고 사미승이 되었다.

그후 천장암 마곡사의 토굴에서 수행하였고 부석사를 거쳐 통도사의 백운암에서 마침내 두 번째 깨달음을 얻어 경허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만공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받았다. 이후 만공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 명산대찰에서 수행하였고 충남 예산의 덕숭산에 머물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선풍을 드날리다가 1946년 10월 20일, 세수 76세, 법랍 62세로 열반에 들었다.

옛날 부처님 살아계실 때, 아난존자가 부처님을 ‘입안의 혀’처럼 극진히 시봉했다고 불전(佛傳)은 전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공은 그의 스승 경허 선사를 얼마나 존경하고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모른다. 만공이 젊었을 때, 경허 선사를 모시고 해인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이 때 경허 선사는 술과 고기를 마다 않으시고 드시는지라 일부 수행자들 간에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해인사의 눈푸른 선객이었던 제산 스님과 주지 남전 스님은 남들이 뭐라고 하건 경허 선사께 곡차와 고기안주를 올려드렸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하든, 경허 큰 스님께는 곡차와 닭고기를 계속 올릴 것이오.” 주지였던 남전 스님도 맞장구를 쳤다.

“경허 큰 스님같은 어른을 위해서라면 나는 닭 아니라 소라도 잡아 올리기를 서슴지 않겠소.” 이 때 만공 스님은 결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만일 경허 큰 스님을 모시고 깊은 산속에 살다가 양식이 떨어져 공양 올릴 것이 없게 된다면, 저는 기꺼이 제 살점을 점점이 오려서라도 스님을 봉양할 각오입니다.”

그만큼 스승 경허는 제자 만공에게 절대적인 존재였으니, 오늘날에 과연 이토록 극진히 스승을 모시는 제자가 남아 있을까. 만공 스님은 참으로 지혜와 복덕을 두루 갖춘 분이었다. 모든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던 시절이라 큰절이건, 작은 절이건 늘 양식조차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공 스님이 와 계시기만 하면 그 절에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시주도 줄을 이어서 절살림이 금방 넉넉해지곤 하였다. 어느날 비구니 일엽(一葉) 스님이 만공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스님께서 금강산 마하연에 계실 때도 그랬고, 이 수덕사도 그렇고, 스님이 계시기 전에는 끼니걱정하기 바빴는데, 스님께서 머물기만 하시면 시주가 줄을 이어 양식 걱정을 안하게 되니, 스님께서는 대체 전생에 무슨 복을 그리도 많이 지으셨습니까?” “전생에 내가 고생고생 해가면서 저축을 좀 해 두었더니 그게 지금 돌아오는 거야.” “무슨 저축을 어떻게 하셨는데요?” 만공 스님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시더니 말씀을 이어 나갔다.

“전생에 나는 여자였느니라. 그것도 복도 지지리도 없는 여자였다. 부모복도, 형제간 복도 없는 박복한 여자였어. 그래서 전라도 전주땅에서 기생노릇을 했었지.” “예에? 기생을요?” “그 때 내가 육보시(肉布施)를 좀 했지. 그리고 버는 돈이 있으면 굶은 사람들 양식을 사다 주고, 전주 봉서사에 계신 스님들 양식도 대어드리고… 그 때 그 양식들이 저축이 되어서 이제 조금씩 돌아오는 거야.” 만공 스님은 조금도 스스럼없이 당신의 전생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는 하였다.

당신께서는 3생 전에 전주에서 향란이라는 기생노릇을 했는데, 그 때 바로 진묵대사께서 전주 봉서사에 계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후생에는 장수였고, 바로 전생에는 소였다고 말씀하셨다.

“아니 스님께서 바로 전생에 소였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전생이 빚을 갚느라고 소로 태어났었는데, 소노릇을 하면서도 제대로 빚을 못 갚아 그 남은 빚을 갚으려고 중이 되었다.” “소로 사셨으면 빚을 다 갚으셨을 텐데 무슨 빚이 또 남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이 녀석아! 소도 소 나름이지. 여물만 배터지게 먹고 일할 때 게으름을 피우면 소노릇을 하면서도 빚을 갚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늘이는 거야. 그러니 너희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옛스님들은 이렇게 경계하셨느니라. 출가승려라고 해서 신도들이 갖다 주는 시주물을 받아 먹고 중노릇을 게을리 해서 불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이는 신도들의 재물을 도적질한 것과 같은 것이니, 마땅히 죽어서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느냐?” 오늘 우리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전생에 진 빚을 이생에 갚아나가기는커녕, 행여라도 새로운 빚을 늘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일이다.

1937년 3월10일 아침의 일이었다. 잠시 충남 마곡사의 주지를 맡고 있던 만공 스님은 그날 서울행차를 준비하고 계셨다. 다음날인 3월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미나미(南次郞)총독이 주재하는 조선불교31본산 주지회의가 소집된 때문이었다.

당시 스님은 시봉하고 있던 어린소년 몽술행자가 스님께 여주었다. “공양간에서 듣자니 노스님께서 오늘 경성(京城)에 가신다고들 하던데 정말시옵니까요?” 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만공 스님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셨다. “너 이녀석 몽술아! 몽술이 너는 도대체 조선사람이더냐, 왜놈이더냐?” “예에? 그야 저는 조선사람입니다요. 노스님.” “그런데 어째서 조선사람 입에서 ‘경성’이라는 소리가 나오는고? 경성이라고 하는 소리는 왜놈들이 억지를 갖다 붙인 이름이요, 무학대사께서는 한양이라고 하셨느니라!” “아, 예 노스님. 잘못했사옵니다.”

“다시는 경성 소리 입에 담지 말아라!” “예, 노스님 명심하겠습니다.” 만공 스님은 그만큼 나라 잃은 통분을 가슴 속에 늘 담고 계셨고 단 한번도 ‘경성’이라는 소리를 입에 담지 않으셨다. 1937년 3월11일 오전 11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는 조선8도의 도지사와 조선불교 3본산주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나미총독의 주재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조선불교의 승려들이 도성출입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일본의 덕분이요. 그렇지 않소?”간교한 미나미총독의 인사말이 끝나자 조선의 여러 주지들이 이구동성 아부하고 나섰다.

“사찰령을 선도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데라우찌 전 총독의 은혜가 정말 중합니다.” 바로 그 때였다. 마곡사 주지 만공 스님이 더 이상 치사한 아부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면서 일어섰다. “청정이 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회의장이 떠나갈 듯 큰소리로 할을 한 만공 스님은 계속해서 사자후를 토했다.

“한일합방 이전에는 절 안에서 음행하거나 술마시는 파계자가 있으면 뒤통수에 대고 나팔을 불어 내쫓거나 북을 지워 두들기며 산문출송을 해온 관계로 규모있는 교단생활을 하여 불조의 혜명을 이어왔다. 그러나 합병되어 사찰령 사법이 시행된 뒤로는 주지의 전단이 자행되어 승통이 문란하게 되고 일본승려의 파계하는 영향을 받아 취처, 음주, 육식을 공인하게 되었으니 조선승려 전부가 파계승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 책임이 모두 총독부 당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경(經)에 이르시기를 ‘한 비구를 파계시켜도 삼아승지겁동안 아비지옥에 덜어진다’하였거늘, 7천승려 전부를 일시에 파계하게 한 공밖에 없는 총독부 당국에 무슨 대단한 업적이 있겠는가?…(중략)…

이같은 죄를 지은 데라우찌(寺內)총독 이하 당국자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겠는가? 무간아비지옥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만공 스님의 사자후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미나미총독이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마곡사 주지는 조금 전에 내뱉은 망언을 당장 취소하시오!” 이에 만공 스님은 사정없이 주장자를 높이 들어 세 번 내리친 뒤 또 한번 사자후를 토했다.

“마곡사 주지 송만공은 내가 한 말을 절대로 취소할 수 없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온갖 교언영색으로 데라우찌 전임 총독을 칭찬한 조선승려들은 잘 들어야 할 것이오! 데라우찌의 은혜를 갚고자 하거든 부지런히 도를 닦아 성불하여 데라우찌를 지옥에서 건져내기부터 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조선불교를 진정으로 진흥시키고자 한다면 총독부가 조선불교를 간섭해선 안될 것이니 조선불교를 조선승려들에게 맡기시오!”

이날, 피를 토하듯 내쏟는 만공 스님의 사자후로 총독부 회의는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2천만 조선인의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쥐고 있던 미나미 총독 옆에서 이토록 거침없는 사자후를 통쾌하게 내쏟을 수 있는 스님이 과연 만공 스님 말고 또 누가 있었을 것인가.

이날 밤, 이 통쾌한 소식을 전해들은 만해 한용운 스님은 만공 스님의 속소까지 찾아와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참으로 잘하셨소! 과연 천하의 만공 스님이시오! 천하의 만공이 칼을 뽑아들었으니 저 쥐새끼 같은 왜놈들 간담이 서늘했겠구먼. 음, 하하하 헌데 만공, 기왕이면 할만 하지 말고 주장자로 한방씩 갈겨주지 그러셨나?” 이에 만공 스님이 한마디 응수했다.

“이 좀스런 사람아, 미련한 곰은 몽둥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을 하는 법이네.” 과연 만공 스님은 스러져 가던 우리불교를 지켜낸 통큰 사자였음에 틀림없다. 청와대에서 밥만 먹자고 해도 쭈루루 달려가는 스님들, 장관, 국회의원만 뜨면 버선발로 달려나가 굽실거리는 스님은 설마 아니계시겠지? 만공 스님이 총독부회의를 망쳐버린 당시 조선총독부의 경무총감은 공교롭게도 전임 데라우찌 총독의 아들이었다.

그야말로,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경무총감인데, 자기 아버지가 아비지옥에 떨어져 있다는 모욕을 당했으니 그는 만공 스님은 무슨 죄목으로든 잡아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나미총독이 “만공은 그렇게 다룰 인물이 아니다”고 극구 만류하고 오히려 만공 스님에게 당근정책을 쓰기로 했다.그래서 미나미 총독은 충청도 도지사를 시켜 만공 스님께 일본유람을 시켜드리도록 유회책을 썼다. “미나미 총독 각하께서 스님께 특별히 은전을 베푸시는 것이니 일본유람을 다녀오십시오.” 이 말을 들은 만공 스님은 일언지하에 일본유람을 거절했다.

“일본 유람. 난 일없네!” “아니 이건 총독각하의 특별한 은전인데….” “이 사람아, 나라잃은 백성은 이미 송장이거늘 송장을 데려다가 일본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자 보아라, 저자들이 바로 조선불교계의 송장들이다’하고 구경이나 시키자는건데, 내 어찌 그런 망신을 당하러 일본에 간단 말인가! 일본 유람 못가서 안달이 난 놈들이 수두룩 할테니 그자들이나 데리고 가게!” 만공 스님은 그런 분이셨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