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사위국에 계실 때였다.
당시 나이 80이 된 어떤 바라문이 있었는데, 근느 수많은 재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매우 완고하고 미련하며, 또 탐심이 많고 인색하여 부처님으로서도 교화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쳐 주는 불법을 알 턱이 없었다.
이 노인은 늘그막에도 집을 짓고 있었다. 앞에는 사랑채, 뒤에는 별당을 짓고,시원한 다락과 따뜻한 방 그리고 동서로 수십 칸의 곁방을 지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이 완성되었으나 별당의 앞 차양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노인은 거부이면서도 한 푼의 경비라도 줄이기 위해 직접을 일을 지휘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막노동도 마다 않고 했다.
이때 부처님께서 혜안으로 보니 그 노인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복덕이 많은 분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으나 이렇게 만나 이야기하기는 처음입니다.
마침 사람의 생사에 관계되는 중요한 계송을 일러주고 싶은데 잠깐 일을 멈추고 같이 이야기할 수 없겠습니까?”
노인은 즉시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창 바빠서 이야기할 겨를이 없소. 뒷날 한가할 때 이야기합시다.
그런데 중요하다는 게송이 무엇인지 그거나 잠깐 들려주시오.”
이에 부처님은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자식이 있다 재물이 있다 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저 허덕이누나.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허무한 것이니
자식이다 재물이다 하며 무엇을 걱정하리.
더울 때는 시원한 데서 거처하리라
추울 때는 따듯한 데서 거처하리라 하며
어리석은 사람은 호사스런 걱종도 많지만
닥쳐오는 재앙은 알지 못하네.
어리석은 사람은 더욱 어리석어져서
스스로는 지혜롭다 하나니,
어리석으면서 지혜롭다 하면
그야말로 더없는 어리석음이니라.
이 게송을 듣고 바라문 노인은 말했다.
“그 게송 참 좋습니다. 지금은 너무 바쁘니 다음에 와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이에 부처님은 그 노인을 매우 가엾게 여기는 표정을 지으며 그곳을 떠나셨다.
부처님이 떠나신 뒤 그 노인은 손수 서까래를 올리다가 서까래가 떨어져 그 자리에서 깔려 즉사하였다. 부처님이 이곳을 떠난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이 노인의 집안은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부처님은 이 마을 어귀에 이르러 수십 명의 바라문들을 만났다.
바라문들은 부처님께 물었다.
“어디서 오십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지금 저기 늙은 바라문의 집에 갔는데, 그를 위해 설법을 해주려 했으나,
내 말을 듣지 않다가 방금 저승으로 떠났다.”
이렇게 대답하신 부처님은 길에서 만난 바라문들을 위해 게송을 다시 말씀해 주셨다.
그들은 이 게송을 듣고 진리의 맛을 음미하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어주셨다.
현명한 사람이 지혜로운 자와 가까이 있으면
마치 혓바닥이 음식맛을 아는 것처럼
비록 잠깐 동안 친했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은
자신에게 근심을 불러오나니
유쾌한 마음으로 악을 짓다가
스스로 무서운 재앙을 가져온다
이 게송을 들은 바라문들은 즉시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서 매우 기뻐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잘 받들어 행하였다.
<<법구비유경>>
탐욕과 인색, 그리고 사나운 심통이 얼굴에 가득한 한 노인을 연상케 한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부를 가지는 일체의 과정은 감사의 마음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감사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때 풍요의 연과는 거리가 멀다.
하늘의 부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부르기만 하면 반드시 대답하고 또 부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반드시 주어진다.
그러므로 만인의 것인 동시에 나의 것인 부는 나를 즐겁게 하고 또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인 동시에 나의 것인 부는 나를 즐겁게 하고 또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의미를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명언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탐욕스런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더욱 탐욕스러워질 것이다.
탐욕은 노경과 모순되지 않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다른 감정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감에 따라 더욱 탐욕스러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