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살생·자비 실천 모범
경허 큰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보임 공부를 위해 거처를 천장암으로 옮겼다.
마침 속가의 형이었던 태허 스님이 천장암 암주로 있었는데,
경허 스님은 천장암에서 좀 떨어진 산 속에 있는 지장암에 홀로 계시면서
보임 공부에 몰입해 있었다.
몇 달이고 옷도 바꾸어 입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으므로
옷 속에는 말 그대로 이 떼가 득시글거렸다.
얼마나 많은 이 떼가 득시글거렸는지 스님의 온 몸은 이 떼에게 뜯겨 짓물러 있을 지경이었다.
하루에 한번 공양을 갖다드리던 사미가 보다 못해 헌옷을 벗으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으시라고 간청했지만 스님은 번번히 거절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고 보니 입고 있던 옷이 땟국물과 이 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사미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게되자 마지못해 경허 스님은 새 옷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그런데 스님은 그 많은 이들을 새 옷에 다 옮긴 후에야 갈아입었다.
불살생, 자비…. 우리 중생들은 흔히 불살생, 자비를 가르침 속에서만 만나고 있지는 않을까.
경허 스님이 천장암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 밤, 제자 만공이 등불을 켜들고 큰방으로 들어가니 경허 스님께서 누워 계셨다.
그런데 불빛에 비춰보니 경허 스님의 배 위에 시커먼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게 아닌가.
제자 만공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스님, 스님 배위에 독사가 앉아 있습니다요 스님!”
그러나 경허 스님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으신 채 담담히 대답했다.
“실컷 놀다가 가게 그냥 내버려두어라.”
만공은 어쩔줄 몰라 절절 매고 있었는데 이윽고 독사가 스스로 또아리를 풀고
슬슬 배위에서 내려와 뒷문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경허 스님께서 만공에게 이르셨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적어도 마음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어야 공부가 되느니라.”
경허 스님이 오랫동안 주석했던 천장암은 지금도 가난한 작은 암자라
신심 깊은 불자들만 참배할 뿐 관광객은 별로 찾지 않는다.
최근에는 천장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잘 다듬어져서 참배객들에게 별 불편을 주지 않지만,
경허 스님께서 머무시던 조선조 말에는 그야말로 벽촌 오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장암이라
신도도 그리 많지 않았고 절 살림도 어렵기 그지없었다.
걸핏하면 조석 끓일 양식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더더구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시대였고 백성들의 살림 또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으니 시주금이 넉넉히 들어올리 없었고
공양미인들 넉넉히 가져올리 없었다.
그래서 그때 천장암에 계시던 스님들은
누구나 바랑을 메고 멀리 해미읍까지 탁발을 나가시곤 했었다.
물론 경허 스님도 직접 탁발을 나가셨는데 하루는 경허 스님이 해미읍 어느 솟을대문 앞에서
탁발을 하기 위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밥술 깨나 먹고 삼직한 솟을대문이 열리더니 행세 깨나 하고 사는 양반이
거드름을 피우며 경허 스님께 힐문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와서 목탁을 치는 것을 보니 곡식이라도 좀 얻어가자는 것 같은데,
그대는 과연 중이란 말인가, 거렁뱅이란 말인가?”
경허 스님은 합장하여 예를 갖춘 후에 나직히 대답했다.
“절에서 살며 수행하고 있으니 중이 분명하옵고, 오늘은 양식을 탁발하러 왔으니
거렁뱅이 또한 분명한가 합니다.”
경허 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 양반은 그만 할말을 잃고 범상치 않은 스님의 기품에 눌려 무례를 사죄하고
극진히 안으로 모셔 크게 시주하였다.
이렇듯 억불숭유정책의 시절에도 홍성, 해미 인근의 유생들이 경허 스님의 덕화에 감동하여
천장암 중창불사에 크게 동참한 기록들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스님의 기품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