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나니…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나니…”

천하의 선객 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운봉 성수(雲峰 性粹) 큰 스님은 1889년 음력 12월 7일, 부처님 성도일 전날 밤에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속가의 성씨는 동래 정(鄭), 이름은 성수였고 운봉은 법호이다.

13세 때 부친을 따라 경북 영천 은해사에 불공을 올리러 갔다가 발심하여 김일하 스님께 의지하여 출가 득도하였고, 23세에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만하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등 천하의 명산고찰을 찾아다니며 당대의 선지식들을 친견하고 고행정진하던 중 호남땅 백암산 운문암에서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게송을 읊었다.

“문밖에 나왔다가 갑작스러이

차가운 기운이 뼛속에 사무쳤네.

가슴 속에 오랫동안 걸렸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서 자취도 없네.

서릿발에 날리는 달밤을 밤에

나그네들 헤어져 떠나간 다음

오색단청 누각을 홀로 서서

공산에 흐르는 물 굽어 보누나.”

운봉은 곧바로 부산 선암사로 혜월 스님을 찾아뵙고 점검받기를 청했다. 어느 날 혜월 스님께 물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어느 곳에 안신입명(安心立命)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혜월 스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이에 운봉이 혜월 스님을 한 대 치면서 한마디 했다.

“살아있는 용(活龍)이 어찌하여 썩은 물에 잠겨있습니까?”

“그러자 혜월 스님이 반문했다.

“그럼 너는 어찌하겠느냐?”

이에 운봉이 불자를 들어 보였다.

그러나 혜월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러자 운봉이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스님, 기러기가 창밖에 지나간 것을 모르십니까?”

혜월 스님은 그제서야 하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속일수는 없구나.”

그리고 혜월 스님은 운봉에게 전법게를 내렸다.

“일체 함이 있는 법은

본래 진실상이 없는 것.

저 상에 만일 상이 없으면

곧 그대로 견성이니라.

모든 상은 본래 상이 아닌 것.

모양 없고 또한 머무름 없으니

이와같은 이치를 바로 알면

이것이 견성한 사람이니라.”

이 때 ‘운봉’이라는 법호를 내려 받았으니, 이후 운봉은 번뜩이는 선지를 휘날리며 몰려드는 후학들을 제접했다.

“겨울엔 진주목 입는다”

운봉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보월 스님이 법상에 올라 옛 선문고사를 이야기 하다가 “옛날 운문 스님이 그 절 뒷산 암주에게 옷 한 벌을 보냈더니, 암주가 그 옷을 받지 않고 하는 말이 ‘우리 어머니가 준 옷만 해도 입고 남소’라고 하자, ‘그럼, 어머니가 낳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는가?’하고 물으니 그 암주는 그만 대답을 못하였다. 그대들은 어찌 대답할 것인가? 대중들은 일러라!”

보월 스님이 이렇게 물었으나 대답하는 수좌가 없었다. 이 때 운봉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여름에는 안동포(安東布)를 입고, 겨울에는 진주목(晋州木)을 입는다고 답하리라.”

이에 보월 스님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수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광석화 같은 운봉 스님의 선기(禪機)가 이로부터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이제 운봉은 ‘천하의 선객’이 된 것이었다.

백암산 백양사 운문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양산의 통도사, 동래 범어사, 내원사, 도리사, 수덕사 등지에서 장장 20여년의 안거를 통해 운봉 스님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다지고 다지고 또 다졌다.

그러던 중 운봉 스님은 한국불교사에 우뚝 솟아오른 또 한사람의 특출한 선객을 키워냈으니 운봉의 선맥을 이은 향곡(香谷)이 바로 그의 제자이다.

운봉은 말년에 그의 제자 향곡이 부산 동쪽 월내(月內)라는 곳에 세운 묘관음사(妙觀音寺)에서 지친 심신을 쉬고 있었다.

이 때 그의 제자 향곡과 나눈 선문답이 유명한 사제간의 법거량으로 내려오고 있다. 제자 향곡이 스승 운봉 스님께 물었다.

“스님, 스님께서는 도를 깨치셨습니가?”

“깨달았다면 벌써 도가 아니며, 도라면 벌써 깨달음이 아니다.”

“열반로두(涅槃路頭)가 어디 있습니까?”

“아야아야!”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어디로 가시렵니까?”

“이웃 마을 시줏집에 물소가 되어 가리라.”

“그러면 소라고 불러야 합니까. 스님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풀을 먹고 싶으면 풀을 먹고, 물을 마시고 싶으면 물을 마시느니라.”

운봉 스님은 그해 봄, 음력 2월 그믐날 저녁에 손수‘향곡장실(香谷丈室)에 부친다’는 임종게를 써서 뒷일을 향곡에게 맡겼다.

“서쪽에서 온 문채 없는 인장(印章)은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 전하느니 받느니를 떠나고 보면 해와 달은 동행하지 않으리라.”

제자 향곡이 이 글을 보고 운봉 스님께 다시 여쭈었다.

“스님,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저희들은 누구를 의지하리까?”

운봉 스님은 오른손으로 방바닥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면서 육자배기를 불렀다.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 오는구나.

우장 삿갓을 두드리고서

김을 메러 갈거나….”

노래 부르기를 마치자 향곡이 다시 하 번 스승을 불렀다.

“스님!”

“날 불러 무얼 하려구…?”

그리고는 그대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수많은 수좌들을 이 땅에 남겨둔 채 운봉은 아쉽게도 이 세상과의 짧은 인연을 접고 말았으니 스님의 세속 나이는 겨우 5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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