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하고 원효·경허 팔지 말라”

“파계하고 원효·경허 팔지 말라”

만암 스님은 흉년에 끼니를 굶는 백성들의 참상을 가장 마음 아파 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는 정도면 늘 백양사 안에서 도와주려고 애썼다. 개울에 보를 쌓게 하고 양식을 품삯으로 준 것도, 산에 나무 심는 일을 시키고 품삯을 양식으로 준 것도 모두 굶고 있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 해의 흉년이 아니라 2년, 3년 계속된 흉년은 만암 스님의 도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고 속 곡식 자갈과 뭐가달라

흉년이 거듭된 어느 해 보릿고개를 당해서 만암 스님은 소달구지에 자갈을 담은 가마니를 몇 개 싣고 어떤 부잣집을 찾아갔다. 그 부잣집 곡식창고 안에는 해묵은 벼가 가득 쌓여 있었는데, 굶주리는 인근 백성들이 아무리 눈물로 애원을 해도 곡식을 나누어주기는커녕 1년만 빌려 달라고 해도 들은 척을 아니 한다는 원성이 퍼져 있었다.

만암 스님은 그 부잣집에 당도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부자에게 말했다.

“내가 싣고 온 이 가마니들을 맡길테니 그 대신 벼 몇 가마니만 빌려 주시오. 이자까지 붙여서 일년 후에 갚으로오리다.”

“아니, 스님이 싣고 온 이 가마니 안에 뭐가 들어있는데 이걸 맡기고 벼를 빌려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만암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예, 이 가마니 안에는 자갈이 들어있습니다.”

“뭐요? 자갈이라니?”

“개천 바닥에 쌓여있는 돌자갈 말씀입니다.”

“아니 그럼 이 자갈을 창고에 잡아 놓고 벼를 빌려달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벼나 자갈이나 창고 안에 쌓아두기만 할 바에야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자갈은 사람이 배고플 때 삶아먹을 수 없으니 사람을 살릴 수 없고, 창고 속에 쌓인 벼는 삶아 먹을 수 있어 배고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 그 차이가 있을뿐이지요.”

만암 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 부자는 할말을 잃었다. 곡식은 배고픈 사람 먹여 살리는데 그 값어치가 있는 것이지 창고에 쌓아두기만 한데서야 자갈을 쌓아 놓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만암 스님의 말뜻을 알아들은 부자는 뒤늦게야 부끄러워하며 곡간 문을 열고 벼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청정계율 목숨처럼 여겨

열 한 살의 어린 나이에 동진 출가한 만암 스님은 청정계율을 목숨처럼 지켜오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치하의 우리 불교계는 왜색불교에 젖어서 출가승려가 부인을 얻고 자식을 두는가 하면 술 마시고 육식을 하는 등 청정계율이 갈수록 무너져가고 있었다. 만암 스님은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백양사의 한 젊은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 오는 길에 술을 거나하게 걸치고 돌아오다가 절 마당에서 만암 스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허허 이런 녀석을 보았는가! 너 분명히 술을 마시고 왔으렷다?”

“예, 스님. 소승이 한 잔 하고 왔습니다요…”

젊은 승려는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스님 앞에 나섰다.

“너 이놈! 백양사 중창불사에 보태겠다고 탁발을 나가더니, 탁발한 곡식을 팔아 술을 마시고 와?”

“에이 참 스님두… 아 내일 더 많이 탁발을 해오면 될 것 아닙니까?”

“너 이놈! 당장 승복 벗어놓고 백양사에서 나가지 못할까!”

“예? 아니 곡차 한 잔 했다고 나가라니요 스님? 아 옛날 원효 대사나 경허 선사는 곡차를 즐기셨는데…”

“너 이놈! 감히 어디서 계를 파하고 원효 대사, 겅허 선사를 팔아먹느냐? 네놈이 그럼 원효 대사처럼 교학에 달통하고 백성들을 구제하고 자비행을 실천했더냐? 네놈이 과연 경허 선사처럼 생사의 도리를 깨치고 불도를 이루었느냐?”

만암 스님은 그 젊은 승려를 사정없이 주장자로 때리면서 엄히 꾸짖었다.

“산문에 들어와 삭발출가한 수행자들 가운데 걸핏하면 계율을 어기고 취처음주에 육식마저 하면서 참회하기는커녕 원효 대사도 곡차를 마셨네, 원효 대사도 요석공주를 보았네, 진묵 대사, 겅허 선사도 곡차를 마셨네 하면서 핑계 삼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허나 이는 어리석은 자들이 그림자만 보고 실체를 보지 못함이니, 나는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당장 내 앞에서 옷 벗고 나가거라!”

평상시 까막까치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노루 다람쥐에게도 포근한 사랑을 나눠주시던 만암 스님었지만 계율을 어긴 자에겐 서릿발 같은 꾸짖음을 내리셨으니 백양사의 가풍이 칼날 같았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1956년, 만암 스님의 세속 나이가 여든 한 살을 넘었다.

“종조를 바꾼 것은 환부역조와 같다”고 꾸짖고 종정 감투를 미련 없이 벗어던진 후 백양사로 내려와 오직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시던 만암 스님은 12월 어느 날 손주상좌를 불러 스님이 거처하시던 방 다락문을 열게 하시고는 다락방 안에서 궤를 꺼내게 하고 그 귀속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방바닥에 꺼내게 하였다. 그 궤 안에는 만암 스님이 평생 쓰던 지필묵이며, 경책이며, 낡은 옷가지들 몇 점이 들어있었다. 만암 스님은 당신이 쓰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손수 집어 들고 전해줄 사람을 일일이 지목했다.

“마지막 입는 옷엔 주머니 없어”

“이건 서옹한테 주고, 이건 월하한테 전하고, 또 이건 정열이, 영옥이, 이건 원주 주고, 가만 있거라. 이것은 공양주한테 주거라…”

“아니 스님, 왜 이렇게 물건들을 죄다 나누어 주십니까요 스님?”

영문 모르는 손주상좌가 스님께 물었다.

“인석아, 마지막 입는 옷에는 주머니가 없어. 담아가지고 가려 해도 소용없는 일인거야…”

“예에? 마지막 입는 옷이라니요?”

세상 떠날 때 마지막 입는 옷 말이다. 참 너는 뭐가 갖고 싶으냐?”

“아이구 스님, 저는 아무것도 안주셔도 괜찮습니다.”

“아 여기 염주가 있구나. 너는 이걸 갖도록 해라.”

스님은 이렇게 당신의 유물을 모두 다 몫지어 나누어 주고 빈털털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저렇게 눈이 오면 명년 농사가 풍년들겠구나…”

만암 스님은 눈을 감으시면서도 백성들의 농사를 걱정하며 열반에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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