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와 숯굽는 영감
16국사중 제 1세인 불일 보조국사가 운수납자로 행각을 하던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자 스님은 하룻밤 쉬어갈 곳을 찾던 중 산기슭에서 숯 굽는 움막을 발견했다.
「주인계십니까?」
「뉘신지요?」
움막 안의 노인은 스님을 맞게 됨이 영광스러운 듯 내다보지도 않던 종전과는 달리 허리를 구부려 합장하며 정중히 모셨다.
「이런 누추한 곳에 스님을 모시게 되다니 그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노인은 감자를 구워 저녁을 대접하고 갈 자리 방에 스님을 쉬시게 했다.
「영감님은 무얼 하시며 사시나요?」
「그저 감자만 심어 연명하면서 숯이나 굽고 산답니다.」
한참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노인에게 스님은 물었다.
「영감님 소원은 무엇입니까?」
「금생에야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다만 내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중국의 만승천자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 소원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선업을 쌓고 열심히 참선을 하시면 됩니다.」
스님은 공부하는 방법을 자상하게 일러줬다.
그 뒤 30여년간 수도에 전념하던 스님은 길상사(현 송광사)에 주석하시게 됐다.
그 당시 길상사는 이미 퇴락될 대로 퇴락돼 외도들이 절을 점거하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께서 외도들에게 길상사 중창의 뜻을 밝혔으나 외도들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여보게. 우리 오늘은 저 스님이나 곯려 주세.」
「그거 재미있겠는데.」
외도들은 절 앞 냇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 한 냄비 끓여 놓고 먹다가는 그 앞을 지나는 스님을 불러 세 웠다.
「스님께서 이 고기를 먹고 다시 산고기를 내놓을 수 있다면 우리가 절을 비워 주겠소.」
스님은 어치구니가 없었으나 말없이 고기를 다 잡수셨다.
그리고는 물로 가서 토해내니 고기들은 다시 살아 꼬리를 흔들며 떼지어 푸드득 거렸다.
스님의 도력에 놀란 외도들은 즉시 절을 떠났다.
지금도 송광사 계곡에는 그 고기가 서식하고 있는데 토해낸 고기라 하여「吐魚」또는「중택이」「중피리」라고 부른다.
그 후 스님은 길상사를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수선사라 개칭하는 한편 정혜결사문을 선포하여 납자를 제접하고 선풍을 드날렸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천태산에서 16나한님이 금나라 천자의 공양청장을 받고 스님을 모시러 왔다.
그러나 스님은 너무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승려신분으로 왕가에 가는 것은 불가하다며 사양하셨다.
「큰 스님께서는 과거의 인연을 생각하시어 눈만 감고 계십시오. 우리가 모시고 갈 것입니다.」
꼭 모셔 가야겠다고 작정한 나한님들은 간곡하면서도 강경하게 권했다.
스님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입정에 드니 순식간에 중국 천태산 나한전에 도착했다.
절에서는 막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난 뒤 대신들은 스님께 아뢰었다.
「천자께서 등창이 났는데 백약이 무효입니다.
해서 이곳 나한님께 백일기도를 올렸더니 나한님들의 신통력으로 스님을 모셔왔습니다. 」
순간 스님의 뇌리엔 산중에서 숯 굽던 노인이 떠올랐다.
스님은 친자의 환부를 만지면서
「내가 하룻밤 잘 쉬어만 갔지. 그대 등 아픈 것은 몰랐구먼. 이렇게 고생해서야 쓰겠는가.
어서 쾌차하여 일어나게.」
하니 천자의 등창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 씻은 듯이 완쾌되었다.
천자는 전생의 인연법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스님, 그냥 가시면 제가 섭섭하여 아니 되옵니다.」
천자는 사양하는 스님에게 보은의 기회를 청하면서 많은 금란가사와 보물을 공양 올리고는 아들인 세자로 하여금 스님을 시봉케 했다.
보조스님께서는 중국의 세자를 시봉으로 삼아 수선사로 돌아오셨다.
보조스님과 함께 온 금나라 세자는 현 송광사가 자리한 조계산 깊숙한 곳에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념하니 그가 바로 담당국사다.
담당국사는 그 후 얼마 전까지 효봉, 구산선사가 주석하던 지금의 삼일앙에 내려와 영천수를 마시면서 공부하다 3일 만에 견성했다.
때문에 그 방을「삼일암」이라 명명했고 약수는「삼일천수」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조계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자리한 천자암 뒷 뜰에는 보조국사와 세자가 짚고 와서 꽂아둔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자랐다는 두 그루의 향나무 쌍향수(천연기념물 제 83호)가 전설을 지닌 채 거목으로 서 있다. 천자암은 불일국제선원의 모체라는 설도 있다.
보조국사는 경신년(1210) 3월 우연히 병을 얻었다.
스님은 7일후 열반에 드실 것을 미리 알아 목욕하신후 27일 아침 법복을 갈아입으시더니 설법전에 나가 대중을 운집시켰다.
법상에 오른 스님은
「대중은 일간자를 남김없이 물어라. 내가 마지막으로 설파하리라.」
하시니 한 제자가 물었다.
「옛날 유마가사가 비야에서 병을 보였고 오늘 스님께선 조계에서 병이 나셨으니 같습니까, 틀립니까?」
「너는 같은가 틀린가만 배웠느냐?」
스님은 주장자로 법상을 두 번 치시고는
「천 가지 만 가지가 여기에 있느니라.」
고 이르시고는 앉은 채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문도들은 향화를 공양 올리고 7일 후 다비 하니 얼굴이 생시와 같았으며 수염이 자라 있었다.
송광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이면 재를 지내 스스로 목우자라 불렸던 보조국사 종재를 봉행하며 그 유덕과 가르침을 기리고 있다.
<松廣寺寺誌>